《후르츠 캔디 버스》 / 박상수/ 《시작》시인선
정지한 낮
문득 시간을 잊고
낮은 고요히 정지해 있네
건물은 부드럽게 탄성을 잃어가네
나는 미성년의 얼굴로
과거로부터 길어 올리는 물기 없는 기억을
낯설게 매만져 보네
상념이 피워 올리는 무용한 잎사귀들
언제나 혼자서 텅 빈 열차를 타네
완전한 명상이 철로를 따라 이어질수록
인간의 얼굴이 떠올랐다 사라지네
인간이 인간을 넘어서지 못하고
모래바람이 불어와 부서진 석상 위를 덮어갈 때
나는 낯선 역에 내리네
의지 없는 몽환
몽환이 둥글게 빚어버리는 모서리를
비로소 인간의 형상을,
떠난 사람들이 동물의 형상으로
백사장 위를 굳어갈 때
무릎을 꿇고
모래를 씹으며 바람을 거스를 때
낮은 고요히 정지해 있네
나는 온통 하얀 낮달의 정령에 휩싸여
침묵이 피워 올리는 여름 나무 밑에 앉아 있네
이름 모를 열매에서 즙은 새어나오며
눈먼 자의 시간이 대기로 번져가네
[감상]
시간은 삶을 지배하며 모든 물리를 공식 안에 가두어 놓았습니다. 그리하여 몸은 <시간>에 속박된 채 인과에 얽혀 한정된 장소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 시는 한낮을 정지시킴으로서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며 <나>와 <인간>의 정체성을 목격합니다. 지상에서 인간이 모두 사라지고 그들이 만들어 놓은 <석상>만이 모래 속에 묻혀버렸을 때 허망한 적막 같은 것. 그것 또한 <낯선 역>의 풍경일 뿐이어서, 레일처럼 뻗어 있는 시간의 축을 따라 문명의 생성과 소멸이 간이역처럼 스쳐갈 것입니다. 인간은 다시 동물에서 우상을 만들며 <인간이 인간을 넘어서>는 방법을 생각하겠지요. 마치 <여름 나무 밑> 장자의 꿈처럼 말입니다. 분방한 상상력의 스케일로 안내되는 색다른 여행을 다녀온 기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