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떫은 생 - 윤석정

2006.02.17 15:36

윤성택 조회 수:1967 추천:232

<떫은 생> / 윤석정/  《현대문학》2006년 2월호


        떫은 생

        봄이 왔다 나는 설익은 약속처럼 헤어지기 바빴다
        꽃이 떨어진 자리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여린 감들
        구부러진 길 끝에 앉아 나는 태양의 부피를 재곤 했다
        내 심장에 수혈하는 햇살바늘
        여름부터 검은 바늘자국이 따끔거렸다
        아프지 않을 때만 감들이 보였는데
        감들의 낯빛은 점점 태양을 닮아갔다
        새부리에 쪼인 감들은 유독 붉디붉었다
        감들은 속곳을 전부 드러낸 채 떨어지거나
        가까스로 공중에 매달려 있었다
        새들이 빼먹지 못한 감씨가 얼핏 보이곤 했다
        몸을 눈부시게 열고도 길에서 떠날 수 없는
        반쪽짜리 생, 그 감은 한 번 꽃피자 입을 쫙 벌리고
        뿌리에 달라붙은 눅눅한 어둠까지 감아올렸다
        어둠은 점점 바깥을 달콤하게 부풀리며
        심장에 몰려와 단단하게 여물어갔다
        눈이 내리자
        쭈글쭈글한 감들이 서둘러 햇볕을 쬐러나왔다
        더는 빨아들일 어둠이 없어서 바깥을 컴컴하게 만들기 시작했는데
        끝내 어둠에 덮여 어둠 속에 들어간 늙은 감들이
        떫디떫은 심장을 남겨놓았다
        다시 봄이 왔다 나는 어둠을 빨아들이기 위해
        가지 끝으로 옮겨 앉았다


[감상]
감의 생태적 흐름과 관찰을 우리의 삶과 <환생>과 잇대어 풀어내는 치열함이 돋보이는 시입니다. 사계절로 치닫는 과정은 한 <떫은 생>이 되며, 그 부피의 자람과 새의 날카로운 부리는 어느새 온갖 신산을 겪는 우리네와 닮아 있습니다. 눈여겨 볼만한 것은 어둠을 다루는 능숙함에 있는데, <어둠은 점점 바깥을 달콤하게 부풀>린다거나 <끝내 어둠에 덮여 어둠 속에 들어간 늙은 감들>과 같은 표현이 그러합니다. 감나무 한그루에는 온전히 개성을 달리한 수많은 개체들이 달려 있고, 그 중 하나인 <나>는 다른 감들과 섞여 떫은 생을 살다가 사라질 것입니다. <어둠>과 <봄>의 상징이 그러하듯, 지금 우리는 누군가가 살다간 봄을 다시 살러온 <가지 끝> 또 다른 생이 아닐까요.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1031 바람막이 - 신정민 [2] 2007.06.13 1303 141
1030 검은 젖 - 이영광 2008.02.12 1221 141
1029 무의지의 수련, 부풀었다 - 김이듬 2007.01.19 1146 143
1028 저녁에 이야기하는 것들 - 고영민 [2] 2008.06.17 1897 143
1027 검은 편지지 - 김경인 2007.07.24 1159 144
1026 녹색에 대한 집착 - 정겸 2007.06.08 1354 145
1025 공중의 시간 - 유희경 2008.12.16 1526 145
1024 얼굴 없는 기억 - 김일영 2003.04.10 1095 146
1023 물의 베개 - 박성우 [1] 2007.04.25 1307 146
1022 밤의 능선은 리드미컬하다 - 문세정 2008.01.29 1328 146
1021 합체 - 안현미 2010.01.06 1029 146
1020 오래전에 잊은 이의 눈썹 - 허수경 [2] 2011.03.15 1813 146
1019 그 집 - 김우섭 2007.06.26 1504 147
1018 타전 - 정영선 2007.07.02 1237 147
1017 혀 - 장옥관 2010.02.12 1757 147
1016 두 번 쓸쓸한 전화 - 한명희 [1] 2003.08.18 1229 148
1015 허공의 안쪽 - 정철훈 [2] 2007.05.30 1508 148
1014 저녁 빛에 마음 베인다 - 이기철 [1] 2007.07.06 1545 148
1013 목단꽃 이불 - 손순미 2003.04.15 1004 149
1012 꿈속에서 아는 사람이 죽는다는 것 - 이진명 2003.05.27 1018 1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