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장미 - 박설희

2009.03.09 22:55

윤성택 조회 수:1737 추천:98

  
《쪽문으로 드나드는 구름》  / 박설희 (2006년 『실천문학』으로 등단) / 《실천문학》의 시집 177

        장미

        빨간 신호등 하나 켜 있다
        내 발을 묶는다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한 순간 장미꽃 같은 그 안에 갇힌다
        붉은 꽃잎이 겹겹이 나를 감싼다

        이 거리는 풍성한 장미 한 다발  
        길들이 줄기처럼 뻗어나간다
        둥근 잎새마다 빼곡히 들어찬 상점들
        셔터의 문이 올라가면 꽃잎 하나 환히 피어난다
        나는 그 곳에 들어가 향수를 산다
        물관 체관을 따라 지하로 지상으로 오르내리는
        인파에 밀려 나는 풀벌레처럼
        봉오리로 봉오리로
        장미꽃은 계속 피어난다
        내 손이 더듬은 속옷 몇 장, 셔츠와 바지, 자동판매기
        내딛는 공간마다
        자전거가 튀어나온다, 과일들이 우르르 쏟아진다, 차가 급정거 한다
        어디에 가시가 있었는지
        마음 속에서 피가 점점이 배어 나온다

        까마득한 어둠 끝에 핀,
        빨간 신호등 하나 깜박인다
        묶인 발이 풀린다
        건너가야 할 많은 날들이 남아 있다

        
[감상]
신호등 푸른색이 되기까지의 시간 동안, 이 시는 붉고 아름다운 상상의 세계로 식물처럼 뻗어갑니다. 발걸음이 마치 장미다발처럼 묶이고, 속도로 뻗어가는 검은 아스팔트길 곳곳에 붉은 신호등이 탐스럽게도 피어납니다. 시 곳곳에 이렇듯 활기가 도는 것은 상상력에 향기가 번지기 때문입니다. 무료한 일상이 반복되는 우리의 삶에서 장밋빛 세상이 이처럼 가까이 있습니다. 쇼윈도 불빛을 빗댄 장미 꽃잎, 물관 체관이 되는 지하도들, 가시가 암시되는 교통사고 그리고 핏빛 장미의 색감…… 그러다 ‘까마득한 어둠 끝’ 신호등이 푸른색으로 바뀌면 마법이 풀리듯 장미꽃이었던 발들이 풀리고, 다시 일상으로 우리는 쓸쓸히 흩어지겠지요.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1031 바람막이 - 신정민 [2] 2007.06.13 1303 141
1030 검은 젖 - 이영광 2008.02.12 1221 141
1029 무의지의 수련, 부풀었다 - 김이듬 2007.01.19 1146 143
1028 저녁에 이야기하는 것들 - 고영민 [2] 2008.06.17 1897 143
1027 검은 편지지 - 김경인 2007.07.24 1159 144
1026 녹색에 대한 집착 - 정겸 2007.06.08 1355 145
1025 공중의 시간 - 유희경 2008.12.16 1526 145
1024 얼굴 없는 기억 - 김일영 2003.04.10 1095 146
1023 물의 베개 - 박성우 [1] 2007.04.25 1307 146
1022 밤의 능선은 리드미컬하다 - 문세정 2008.01.29 1328 146
1021 합체 - 안현미 2010.01.06 1029 146
1020 오래전에 잊은 이의 눈썹 - 허수경 [2] 2011.03.15 1813 146
1019 그 집 - 김우섭 2007.06.26 1504 147
1018 타전 - 정영선 2007.07.02 1237 147
1017 혀 - 장옥관 2010.02.12 1757 147
1016 두 번 쓸쓸한 전화 - 한명희 [1] 2003.08.18 1229 148
1015 허공의 안쪽 - 정철훈 [2] 2007.05.30 1508 148
1014 저녁 빛에 마음 베인다 - 이기철 [1] 2007.07.06 1545 148
1013 목단꽃 이불 - 손순미 2003.04.15 1004 149
1012 꿈속에서 아는 사람이 죽는다는 것 - 이진명 2003.05.27 1018 1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