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꽃 피는 시간 - 정끝별

2009.02.10 17:10

윤성택 조회 수:1484 추천:97


『와락』 / 정끝별 ( 1988년『문학사상』으로 등단) / 창비시선 295

        꽃 피는 시간

        가던 길 멈추고 꽃핀다
        잊거나 되돌아갈 수 없을 때
        한 꽃 품어 꽃핀다
        내내 꽃피는 꽃차례의 작은 꽃은 빠르고
        딱 한번 꽃피는 높고 큰 꽃은 느리다
        헌 꽃을 댕강 떨궈 흔적 지우는 꽃은 앞이고
        헌 꽃을 새 꽃인 양 매달고 있는 꽃은 뒤다
        나보다 빨리 피는 꽃은 옛날이고
        나보다 늦게 피는 꽃은 내일이다
        배를 땅에 묻고 아래서 위로
        움푹한 배처럼 안에서 밖으로
        한소끔의 밥꽃을
        백기처럼 들었다올렸다 내리는 일이란
        단지 가깝거나 무겁고
        다만 짧거나 어둡다
        담대한 꽃냄새
        방금 꽃핀 저 꽃 아직 뜨겁다
        피는 꽃이다!
        이제 피었으니        
        가던 길 마저 갈 수 있겠다

        
[감상]
봄에게 있어 시간이란 어느 오전의 기다림이겠다 싶습니다. 꽃을 피운다는 건 시간의 도정에서 문득 자신을 돌아볼 때입니다. ‘잊거나 되돌아갈 수 없을 때’ 쓸쓸하게 번져오는 존재감 같은 것. 꽃들은 봄볕에 일제히 피는 듯싶지만 제각각 나름의 사연과 나름의 시간을 가지고 스스로를 버텨왔던 것입니다. 그러니 봄날 지천의 꽃들은 단지 오늘이 아니라, 꽃을 경험하는 과거이자 미래이기도 합니다. 꽃을 피우고 홀씨를 날리고 끊임없이 생존을 위해 번식해가는 저 치열한 生에게 봄날은, 잠시 떠올려보는 ‘미련(未練)’같은 것입니다. 잊지 않았다고 잊지 않겠다고 그렇게 봄이 오고 있습니다.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1191 木도장 - 손택수 2001.06.01 1536 350
1190 흉터 속에는 첫 두근거림이 있다 - 정영선 2001.07.12 1620 337
1189 우체통 - 이진명 2001.04.11 2538 334
1188 트렁크 - 김언희 2001.04.11 1758 332
1187 넝쿨장미 - 신수현 [1] 2001.04.07 2047 332
1186 ㅎ 방직공장의 소녀들 - 이기인 2001.04.24 1668 331
1185 나무에게 묻다 - 천서봉 2001.06.11 1781 327
1184 내 영혼은 오래 되었으나 - 허수경 2001.04.16 2126 327
1183 날아가세요 - 허연 2001.04.12 2172 327
1182 희망은 카프카의 K처럼 - 장석주 2001.06.28 1649 325
1181 전망 좋은 방 - 장경복 2001.04.23 1889 325
1180 백신의 도시, 백신의 서울 - 함민복 2001.05.17 1380 324
1179 간이역 - 김선우 [2] 2001.04.17 2218 324
1178 우울한 샹송 - 이수익 2001.04.13 1876 324
1177 빛을 파는 가게 - 김종보 2001.07.16 1694 322
1176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 - 장석남 [1] 2001.04.28 1759 321
1175 펜 노동자의 일기 - 이윤택 2001.04.26 1661 321
1174 그대들의 나날들 - 마종하 2001.06.29 1522 319
1173 장화홍련 - 최두석 2001.04.30 1504 319
1172 봄의 퍼즐 - 한혜영 [2] 2001.04.03 2355 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