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병(病)에 대하여 - 여태천

2009.02.13 08:59

윤성택 조회 수:1110 추천:94

  
『스윙』 / 여태천 ( 2000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 민음의시 151

        병(病)에 대하여

        나무가 나무에게 집중하는 시간.
        작년의 잎이 그랬던 것처럼
        올해의 잎은 기를 쓰고 자란다.

        나무에게 봄은 잃어버린 시간.
        나무가 나무에게 집중하는 동안
        한나절이 기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그 女子*를 나는 생각한다.
        아무래도 알 수 없는 이 몹쓸 병에 대해
        이웃집 의사는 휴가를 권한다.

        나무가 올해의 잎에 집중하는 동안
        세탁기는 빙글빙글 돌아가고
        나는 대청소를 한다.
        쭉 뻗은 내부순환로를 질주하는 자동차들처럼
        이리저리 청소기를 밀고 다닌다.
        벚꽃의 거리를 가득 메울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한 권의 책도 읽지 않고
        애를 쓰고 있는 행운목에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다리미질을 한다.
        분무기를 떠나는 오늘의 물처럼
        봄이 요란하고,

        하얀 셔츠를 입고 거울을 본다.
        이미 몸은 병이 깊어 하얗게 말라 가고 있으니
        나는 불현듯 소년이 될 수 없을까.
        나무가 나무에 대해 집중하는 동안
        나는 하얀 다리의 그 女子를 다시 생각하는 것이다.


* 윤동주의 시 「병원(病院)」의 한 구절.
        
[감상]
어지럽게 널려진 방안은 치우지만 마음을 치우기가 쉽지 않습니다. 나무에 잎이 돋는 것이 예정된 수순이라면, 나는 누구의 가슴에 피어나는 ‘생각’일까요. 마음에 집중하다보면 생각은 어느덧 병처럼 깊어집니다. 나이가 드는 동안 生의 주도권은 이미 생활에 넘어갔으니, 마음이 향해도 어쩌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그 관념 주위에 너무 많은 장식들이 매달려 있다고 할까요. 이 시는 이렇게 애잔한 마음의 병을 쓸쓸하게 조명하고 있습니다. 아무 일 없는 듯 일상을 지나가지만, 거울 속 자신은 ‘병이 깊어 하얗게 말라 가고’ 있다는 사실. 그러니 순수하게 소년이 소녀에게 갖는 마음처럼 ‘나는 불현듯 소년이 될 수 없을까’…. 봄은 그래서 그리운 무언가에 집중하기 좋은 계절입니다.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1191 木도장 - 손택수 2001.06.01 1536 350
1190 흉터 속에는 첫 두근거림이 있다 - 정영선 2001.07.12 1620 337
1189 우체통 - 이진명 2001.04.11 2538 334
1188 트렁크 - 김언희 2001.04.11 1758 332
1187 넝쿨장미 - 신수현 [1] 2001.04.07 2046 332
1186 ㅎ 방직공장의 소녀들 - 이기인 2001.04.24 1668 331
1185 나무에게 묻다 - 천서봉 2001.06.11 1781 327
1184 내 영혼은 오래 되었으나 - 허수경 2001.04.16 2126 327
1183 날아가세요 - 허연 2001.04.12 2172 327
1182 희망은 카프카의 K처럼 - 장석주 2001.06.28 1649 325
1181 전망 좋은 방 - 장경복 2001.04.23 1889 325
1180 백신의 도시, 백신의 서울 - 함민복 2001.05.17 1380 324
1179 간이역 - 김선우 [2] 2001.04.17 2218 324
1178 우울한 샹송 - 이수익 2001.04.13 1876 324
1177 빛을 파는 가게 - 김종보 2001.07.16 1694 322
1176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 - 장석남 [1] 2001.04.28 1759 321
1175 펜 노동자의 일기 - 이윤택 2001.04.26 1661 321
1174 그대들의 나날들 - 마종하 2001.06.29 1522 319
1173 장화홍련 - 최두석 2001.04.30 1504 319
1172 봄의 퍼즐 - 한혜영 [2] 2001.04.03 2355 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