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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 고경숙

2009.02.17 21:34

윤성택 조회 수:1661 추천:94


『달의 뒷편』 / 고경숙 (2001년 『시현실』로 등단) / 문학의전당 시인선 53

        
            - 종합병동에서        

        봄날 병동은 나른한 혈관이다
        링거액 바꾸는 간호사의 치켜든 손이
        목련처럼 뽀얄 때,
        입원병동을 지나 외래병동 복도를 따라
        몸속 깊숙한 곳으로 간다
        처음 세상에 나오며 보았던 것들,
        여긴 해체와 조립의 세상이다
        순환기내과 앞, 진료를 기다리며
        창가로 모여든 환자들의 안부가
        은은하다
        빛이 안 드는 후미진 복도 벽
        모세혈관에 지탱해 한 발 한 발
        창가로 이동하는 향일성 환자들
        재활에 성공한 봄나무가 되었다
        안과 강 박사님은 오늘 휴진이다
        그럼 눈을 감고 걸으면 되지
        두 팔에 아지랑이가 감기는 걸 보니
        소아과병동, 늘 봄인 곳이다
        여기 오면 맥박수가 늘어
        나는 어린아이가 된다
        수혈이 급한 응급실 문간에 다다르면
        살아 펄떡이는 엄마의 심장이 보인다
        까마득한 기억 속, 모녀가 호흡을 맞춰
        쿵-짝 쿵-짝 주고받았던 펌프질
        막힌 혈관으로 열심히 산소를 실어나르는
        무의식적인 저 희망,
        만개한 꽃이 되어 봄노래를 부르는데…
        완벽한 합체의 세상을 다시 꿈꾸어도 좋으리.

        창밖엔 복사꽃, 빨갛게 열꽃이 올라 있다.


        
[감상]

만물이 소생하는 봄, 생명의 힘찬 약동이 시 곳곳에서 펼쳐집니다. 아프고 절망으로 가득한 종합병동이 이처럼 활기를 얻는 이유는 따뜻한 햇볕에 ‘희망’이 깃들기 때문입니다. 상상력은 햇볕이 닿는 곳마다 생명의 손길로 어루만져 주듯 새로운 비유들로 넘실거립니다. <간호사의 치켜든 손이/ 목련처럼 뽀얄 때>라는 표현이 참 와닿습니다. 링거액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손을 높이 들어야 하는 상황을 생각하면, 간호사의 그 손길은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네 마음만 같습니다. 봄을 만끽하고 있는 이 바램은, <향일성 환자들>에 우리가 속해 있기 때문은 아닌지요. 누군가 기다림에도 ‘열꽃이 올라’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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