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옹이」/ 이수정 / 현대시 2003년 12월호
옹이
그의 상반신엔 가슴에서 등을 관통하는 커다란 옹이가 박혀 있다
옹이를 붙잡고 있는 것은 나무일까 나무는 골목에 쏟아지는 햇빛
이 어지럽다 담벼락 그림자 밑으로 숨어든다 쭈그리고 앉아 고개
를 숙인 대머리 늙은 독수리는 아파트 골목이 서먹서먹하다 그늘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그의 가슴엔 새의 영혼이 갇혀 있을까 굽은
등엔 날개를 숨기고 있을까 아니 한 그릇의 물을 숨기고 있을까 물
이 있을까 갈증만 담겨있진 않을까 아니 한 그릇의 물을 숨기고 있
을까 물이 있을까 갈증만 담겨 있진 않을까 먼지나는 골목을 더듬
는 백내장 낀 눈 깊은 바닥에는 넙치가 살고 있을까 쌀튀밥 뻥튀기
봉지를 요새처럼 쌓아놓고 난쟁이 꼽추는 아파트 골목 구석에 앉
아 있다 고개를 숙이고 까막까막 졸다가 퍼득 잠이 깨면 홀린 듯이
세상에 대고 대포를 쏜다 옹이가 빠지고 영혼이 번개치고 커다란
날개가 펼쳐지고 분수가 터지고 넙치가 눈을 뜬다
[감상]
한번에 읽어서 맛이 느껴지는 시와 두어 번 읽었을 때 맛이 우러나는 시가 있다면 이 시는 후자 쪽입니다. 화자는 아파트가 보이는 공터에서 한 남자를 이별하고, 나무의 옹이를 바라보고, 뻥튀기 기계를 돌리는 노인을 보았을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이미지를 옮겨내는 것에 있는데, 옹이의 모양에서 '넙치의 눈'을 비유하는 솜씨가 그렇습니다. 아직도 머리털이 다 빠진 독수리의 둥근 머리만큼 옹이는 나무에 박혀 있을 것입니다. 시공간상 독수리나 넙치가 나올만한 공간이 아니면서도 공감이 가는 이유는? 이것도 일종의 갈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