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박스」/ 박해람 / 서정시학 2003년 가을호
블랙박스
나를 알고 있는 모든 슬픔과 우울함으로
이 오래된 말들을 부화시키고 싶다
어쩌다 부러진 꽃대를 얼른 땅에다 꽂아 둔다
아내가 혀를 차듯 몇 마디 말과 함께 물을 넣어준다
세상과 세상을 연결해 주는 것이 호흡이 아니라
물인 것을 알았다
뿌리가 생겨나 확인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
다만 꽃이 피면 그것이 꽃나무의 새로 생긴 뿌리일 것이다
친구가 세상의 모든 말들을 잃어버리고 돌아오자
가족들은 서둘러 땅속으로 옮겨 심었다
그 친구의 블랙박스는 어디에서도 찾아지지 않는다
이곳은 아직도 모든 연결장치로 공기(空氣)를 쓰고 있어
아무도 친구의 말을 연결할 수가 없다
마지막 소리가 끊어진 자리에서
붉은 꽃이 순식간에 피었다 지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러고 보면
세상 모든 다급함에는 뿌리가 자라는 것 같다
어쩌면 세상에 없는 날들의 가족들은
아직도 나를 찾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압력에 찌그러져
본래의 모양을 잃어버린 깊은 암호다
나도 이곳에 와서 배운 말일 뿐이다
오늘 피어난 저 꽃잎은 새로운 곳으로 가는 뿌리일 것이다
그러고 보면 가장 화려한 색깔은
맨 마지막에 가서야 몸에서 터져 나온다
그 힘으로 어디든 가는 것이다
[감상]
블랙박스란 항공기 사고의 원인을 밝히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하는 것으로써 그 안에 속도·가속도·고도·방위 등이 저절로 기록되는 장치를 말합니다. 시인은 블랙박스를 친구의 죽음과 연결시키며 그 죽음의 순간을 붉은 꽃의 상징인 피를 보여줍니다. 이 두 소재인 블랙박스와 꽃의 맥락에서 상상력이 뿜어져 나오고 결국 시인은 '세상 모든 다급함에는 뿌리가 자'란다는 직관을 보여줍니다. 납득할 수 없는 친구의 죽음을 통해 나를 발견하는 좋은 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