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섀도라이팅 - 여태천

2006.02.14 10:30

윤성택 조회 수:1307 추천:220

<섀도라이팅> / 여태천/  《현대시》2006년 2월호


        섀도라이팅

        적을 노려보면 손목에 잔뜩 힘이 들어간다 어깨에 힘을 빼고
        가볍게 풋워크를 해보지만 오늘 아침
        책상 위에 팽개쳐둔 생각이 떠나질 않는다
        모든 것을 비우면 그래도 보이는 것이 있다는 말은
        거짓말이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이런 생각들은
        금세 상해 냄새를 풍겼다
        슬그머니 검은 비닐봉지에 담아 버리면 그만이었다
        오해는 그 다음이다
        링 위에선 아무 생각도 하지마
        상대만 보란 말이야
        고등학교 때 체육선생은 스트레이트만 가르쳤다
        한때 미들급 동양챔피언이었던 그는
        술도 아닌 그림자와 스파링하다
        넉다운 됐다
        빈주먹을 날리며 그가 내뱉은 정직한 말들을
        오래 기억했다가 연애편지에 쓴 적이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스텝이 꼬이기는 마찬가지다
        그때부터 나는 한쪽으로만 돌았고
        2라운드가 끝나기 전에 카운터펀치를 맞았다
        링 위에 누워 있으면 머리 위로
        끝없이 쏟아지는 별들 때문에 눈이 부셨지만
        눈이 부어오르면 달이 퍼져 보인다는 사실을 알았다
        오늘밤 구름 뒤의 저 달은 반쯤 찰 것이다
        그것은 진실이다
        만월까지는 한참을 더 기다려야 한다
        그것은 모르는 일이다
        스파링을 하는 동안 응답은 없었다


[감상]
정해진 구조와 뻔한 결말이 아닐 때 시에서 느끼는 재미가 더해지곤 합니다. 그래서 간간히 끼어드는 에피소드는 상상력 얼개로 <스파링>을 부각시키기에 충분합니다. 진지한 삶을 유머로 바꾸는 지점 또한 적극적이고 건강한 긴장이 있어 좋습니다. <체육선생>과 <연애편지>로 자유분방하게 흐르는 사유는 시인만의 냉철한 지적 통제에서 비롯된 에너지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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