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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잠언 - 배용제

2001.05.16 11:17

윤성택 조회 수:1534 추천:278

배용제/ 문학과 사회 2000년 여름호



          꿈의 잠언




1
세월이 너무 태연하게 늙어간다. 고정된 것들 모두 얼어붙는다. 한때의 애인은 컴컴한 지하실 문을 두드리고 사납게 펄럭이던 지상의 그늘들은 겨울 수용소로 압송당했다. 알몸의 나무가 바람의 춤을 익힐 때에도 진리의 서적들은 여전히 혐오스러운 가면을 쓰고 돌아다닌다. 관념의 시절이다. 아무것도 슬프지 않다.


2
부드럽고 천한 여자의 가슴을 그리워한다. 쾌락은 얼마나 정성스레 나를 양육할 것인가. 내 혀는 얼마나 자랑스럽게 욕망의 젖꼭지를 빨며 말을 익힐 것인가. 수치심으로 가득 찬 여자들의 정신을 배우고 싶다.

나는 부패함으로 살찌워진다. 정신의 텃밭에서 썩은 씨앗들이 재배된다. 내 살점들, 아프지 않다.

겨울이 오면, 나는 하얗게 탈색된 세상을 체험하며 온갖 환멸들을 습작한다. 그런 경이로운 시간이 내게 있음을 찬송한다. 헛것의 창작물들이 내 일생을 대표할 것이다. 먼 날, 유물이 진열될 때마다 칭송되는 신으로 군림할 것이다.

나는 쾌락의 아들― 오, 여자들아. 검은 구멍을 열어다오. 내 모든 감각들은 은밀한 숲과 험악한 늪에서 죽음의 꿈이 생성되어가는 과정을 맛보고 싶어한다. 나는 애무의 고통에 대하여 이미 알고 있다.


3
얼음의 나라에는 얼음의 군주가 있고, 얼음의 백성이 있고, 얼음의 길이 있고, 얼음의 자동차가 있고, 얼음의 계절이 있고, 얼음의 산이 있고, 얼음의 숲이 있고, 얼음의 나무가 있고, 얼음의 꽃이 있고, 얼음의 석양이 있고, 얼음의 집이 있고, 얼음의 아이가 있고, 얼음의 노인이 있고, 얼음의 시계가 있고, 얼음의 램프가 있고, 얼음의 하수구가 있고, 얼음의 계단이 있고, 얼음의 창이 있고, 얼음의 눈물이 있고, 얼음의 노래가 있고, 얼음의 춤이 있고, 얼음의 기억이 있고, 얼음의 꿈이 있나니,
그러니 어떤 꿈이 흘러다니겠는가.
어떤 희망이 범람하겠는가.


4
내 정신은 끊임없이 환각 속으로 진화한다.


5
모든 꽃들은 열매를 맺으며 썩어버린다. 다행한 일이다. 살아 있는 것들에게 고정할 수 있는 건 권태뿐이다. 다시 늙은 자들이 두려워하는 저녁이 왔다. 잎의 그늘이 사라진 허공으로 거대한 구름들이 몰려온다. 얼어붙은 별들을 향해 짐승들이 날아간다. 단아하고 선명한 달빛은 언제나 배후에서만 반짝인다. 한 번 사용한 계절은 돌아가 지옥의 방이 된다. 겨울의 밤은 환기구가 없다. 저 태연한 세월.

시계는 늘 무뚝뚝한 변호를 하고 나는 도덕과 가치로부터 제명당했다. 탄생의 죄악을 감당할 어떤 정신이 있을까? 몸은 한 방울의 물이 되기 위해 영혼의 능욕을 견뎌내지만 내 쾌락은 고귀하고 당당하다. 이제 나는 모든 증오를 절제한다. 고요하고 불길한 새벽에 이르기 위해.

단언하건대, 나는 부패한 집이고 몽상이고 노래다. 나는 동요하지 않는다.




[감상]
"삼류극장에서의 한때"라는 시집 손때가 묻어나도록 읽고 다녔었습니다. 詩川의 초대시인으로 모셨을 때 그의 시론을 들을 수 있었는데 새삼 시가 무엇이었는지 깨닫게 해주신 고마운 분이셨습니다. 그의 시는 신화와 상징의 세계를 탐사하고 깨인 눈으로 역사와 시대를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이 있습니다. 존재에 대한 복잡다단한 생각들을 관념의 언어로 싱싱하게 길어 올린다고 할까요. 저에게는 경전처럼 읽히는 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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