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준 / 『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문지),『빵 냄새를 풍기는 거울』(창비)
그린 듯이 앉아 있는 풍경
비가 오면 민둥산인 마음은 밑뿌리로 하얗게 울었다
비가 오면 새파란 양철지붕의 페인트칠이 벗겨진 자리에
녹이 한번 더 슬고,
여름 내내 붉은 반점이 집의 살갗을 뒤덮었다
우리집 앞으로 흐르는 개울창에 녹같은 붉은 꽃들이
섞여 흘러갔고,
밤이 되어 송진이 녹아흐르는 여름의 가장자리에
쇠파리떼들이 조용히 끓었다
하늘에 붉은 달이
양철지붕 칠이 벗겨진 자리에 돋아난 반점같은
꽃들을 핥아주었다
달의 긴 혀로 인해 나의 몸은 언제나 신열이 났다
먼지 자욱이 날리며 집을 나간 개는
침을 하얗게 흘리며 돌아오고
가난한 집일수록 커다란 솥만한
잎을 흔들며 벌레 많은 해당화 그늘이 어둠
속에서 흔들렸지
언덕 위에 언덕이 생기고 구릉을 이루며 산들이 달아나고
피가 도는 발바닥 같은 꽃들이 해당화 위를 지나가자
그 잎 몇 개에는 흔적으로 태어난 아이들이
매달려 있었다
나는 바람이 불 때마다
그린 듯이 앉아 있는 흔적을 흔적으로 지우려고
열매를 무수히 매단
나무를 떠올리곤 한다,
병든 어머니의 희게 빛나는 피부 밑에
천길 낭떠러지 검은 물이 흘러간다
[감상]
비가 오는 정경이 눈에 선합니다. 비는 소리없이 계속 내리고, 시인은 시선은 한없이 자맥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