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 작가세계/ 이은림
서른 부근
초등학교 동창녀석에게 미뤘던 답장을 쓰고 도서관을 나선다 뻑뻑한 회전문
밀치고 몇 개의 계단을 딛고, 우체통에 편지를 찔러 넣는다 횡단보도를 절반
쯤 건넜을 때 느닷없이 쏟아지는 진눈깨비 어쨌거나 첫눈이다 여기저기 사람
들이 웅성대기 시작한다
오늘따라 발자국이 느리게 몸에서 빠져나간다 보증금 500만원 월 20만원짜
리 반지하 자취방 가는 길은 가깝고도 멀다 천주교이문성당 성인용품점 뷰티
러브 영원산부인과 삼일여관을 지나고 푸른피아노 제일은행 동문부동산을 스
친다 터진 진주목걸이의 알맹이처럼 진눈깨비, 아무렇게나 널브러진다 앞서
가던 길이 힘겹게 커브를 튼다 人道 끝에 겨우 몸을 얹은 플라타너스가 몇 장
의 이파리를 놓친다 굼뜬 발자국들 옆으로 자매식당 모닝글로리 LG25가 비켜
선다 어느새 발끝은 집 근처 명성빌딩 앞에서 멎는다 4층짜리 명성빌딩 1층
상가 경원가전재활용품센터 앞에는 설치미술품처럼 놓여진 낡은 가전용품들
이 추위에 떨고 있다 거세지는 진눈깨비가 비늘처럼 덮이기 시작한다 딱딱한
빛 내뿜는 비늘더미들 기억 저편에서 오래된 광고필름이 차르르차르르 돌아
간다 금성김치 냉장고, 대우세탁기 예예, 삼성 크린 가스렌지… 늘어진 전선
들은 자궁 떠난 탯줄처럼 꼼짝 않는다 가로등이 弔燈마냥 우울하게 흔들린다
진눈깨비 점점 더 거세진다 급한 사선을 그으며 바닥으로 곤두박질친다 얼어
붙은 그림자 위에도 진눈깨비 박힌다
동수원 우체국 63-507호라는 주소를 가진 동창녀석 벌써 3년 가까이 복역 중
이다 녀석에게 한번도 罪名 물은 적 없다 드문드문 보내는 답장마다 서른이
가까워졌다는 말만 습관처럼 내뱉을 뿐 서른서른서른… 중얼거릴 때마다 울
컥울컥 끓어 넘치는 설움 그래서 요즘 자주 화상을 입는다 화상연고처럼 차가
운 진눈깨비, 두 손으로 비벼본다 시간은 어느새 자정을 가리키고 큼직한 숫
자를 새긴 버스들 월계 상계 우이동으로 허둥지둥 달려간다 종점인지 시발점
인지 알 수 없는,
[감상]
일상의 사사로운 풍경들이 하나의 시가 될 때 아름답습니다. 사변적인 이야기에서 시적 정황을 도출해내는 솜씨가 뛰어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