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4월 - 한용국

2001.06.15 17:03

윤성택 조회 수:1565 추천:301

한용국 / "詩川" 동인 (http://riverpoem.com)


       4월
                        
  
        애인과 섹스하고 돌아보니 4월이었다  
        여자는 할퀴거나 깨물기를 즐겨서  
        멍든 자리마다 대나무가 꽃을 피웠다  
        오랜 집중이 요구되었던 체위들 사이로  
        폭설이 내리는 풍경이 삽입되었다가는  
        산산조각으로 깨져 나가곤 했다.  
        목련은 비명을 지르며 떨어져 내리는데  
        애인은 몇 시 기차를 타고 떠나갔을까  
        열차표를 손에 쥐고 발을 동동 구르다가  
        식은땀을 흘리며 깨어 보니 서른이었다  
  

        애인과 섹스만 했는데도 4월이 오고  
        방구석은 어느 새 절벽이 되었고  
        책상과 침대가 까마득한 곳에 떠 있었다  
        누가 겨울 내내 우물을 파놓은 걸까  
        왜 어디서도 물소리는 들려오지 않는걸까  
        애인과 섹스한 것은 분명히 죄는 아닌데  
        그러면 내가 녹아 물이 되어 흘러야지  
        생각했을 때 어머니가 달려들어와  
        나이는 똥구멍으로 쳐먹냐고 욕했다  
        그래 누가 내 똥구멍에 흙이라도 채워줘  
        꼬불꼬불 꽃 한 송이라도 피워 올리게  
  

        애인과 섹스를 하지 않아도 4월이 왔을까  
        피도 눈물도 없이 아름다운 혁명도 없이  
        사월이었다 돌아보니 말도 안 되는 서른이었다  



[감상]
눈이 번쩍 뜨이는 시이지요. "섹스"라는 화두를 시에 과감하게 도입한 이 시는, 도발적이고도 패기가 느껴집니다. 그러나 그 안 시의 정서는 아주 차분하고 성찰적인 내용입니다. 고상한 것, 아름다운 것만으로 시를 쓰기에는 세상이 너무 각박합니다. 나이 서른에 다다라 느끼는 그러한 화자의 심경, 저도 공감하게 되는군요. 아무튼 시적 직관력이 뛰어난 시입니다.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1131 소음동 삽화 - 서광일 2001.05.18 1290 277
1130 봄비 - 서영처 2006.01.14 3275 276
1129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 고정희 2001.06.21 1636 276
1128 이름 모를 여자에게 바치는 편지 - 니카노르 파라 [1] 2001.06.07 1460 275
1127 사랑한다는 것 - 안도현 2001.07.02 1970 274
1126 세월의 변명 - 조숙향 [1] 2001.04.09 2479 273
1125 色 - 박경희 [1] 2005.07.28 1693 272
1124 목재소에서 - 박미란 2001.06.08 1234 272
1123 편지 - 이성복 2001.08.09 2481 271
1122 2006신춘문예 당선작 모음 [1] 2006.01.02 2454 270
1121 바구니 - 송찬호 2001.05.07 1406 270
1120 내 안의 골목길 - 위승희 [2] 2001.07.03 1517 269
1119 기억에 대하여 - 이대흠 2001.05.28 1566 269
1118 서른 부근 - 이은림 2001.05.24 1542 269
1117 푸른 밤 - 나희덕 [1] 2001.07.27 1900 268
1116 내 품에, 그대 눈물을 - 이정록 2001.06.22 1488 268
1115 부드러운 감옥 - 이경임 2001.05.31 1397 268
1114 안녕, UFO - 박선경 2006.05.25 1859 267
1113 바닷가 우체국 - 안도현 2001.06.12 1619 267
1112 발령났다 - 김연성 2006.06.27 1662 2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