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레의 집은 아늑하다』(문학동네), 『풋사과의 주름살』(문학과 지성사), 『버드나무 껍질에 세들고 싶다』(문학과지성사)
내 품에, 그대 눈물을
내 가슴은 편지봉투 같아서
그대가 훅 불면 하얀 속이 다 보이지
방을 얻고 도배를 하고
주인에게 주소를 적어 와서
그 주소로 편지를 보내는 거야
소꿉장난 같은 살림살이를 들이는 사이
우체부 아저씨가 우리를 부르면
봉숭아 씨처럼 달려나가는 거야
우리가, 같은 주소를 갖고 있구나
전자레인지 속 빵 봉지처럼
따뜻하게 부풀어오르는 우리의 사랑
내 가슴은 포도밭 종이 봉지야
그대 슬픔마저 알알이 여물 수 있지
그대 눈물의 향을 마시며 나는 바래어 가도 좋아
우표를 붙이지 않아도 그대 그늘에 다가갈 수 있는
내 사랑은 포도밭 종이 봉지야
그대의 온몸에, 내 기쁨을
주렁주렁 매달고 가을로 갈 거야
긴 장마를 건너 햇살 눈부신 가을이 될 거야
[감상]
학교 다닐 적 농활하러 갔다가 그곳에서 포도 봉지 씌우기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 시는 거기서 출발하는군요. 첫 행 "내 가슴은 편지봉투 같아서"라는 문장 하나가 이 시를 끝까지 읽게 만듭니다. 그의 대부분의 시는 이처럼 따뜻합니다. 내 마음의 봉지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