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싱」 / 이혜진/ <시와사상> 2004년 여름호
미싱
미싱이 돈다 돌아간다 돌아갈수록 눈꺼풀이 얇아진다 잠이 두꺼워
진다 담요처럼 온 몸을 덮는 잠, 언제쯤 잘 수 있을까 따각따각 등짝
을 때리는 시계소리,
소리 지르며 달려왔다 동생과 동생과 동생의 눈에서 피고름이 흐
른다 아버지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린다 탕
탕, 멍이 박힌다 푸른 멍자국에서 쇠싹이 자라난다 날카로운 싹들,
손가락처럼 미싱을 누른다 피멍이 든다 울긋불긋 피멍이 든 채로 엄
마는 죽었다 천처럼, 또 바닥처럼 짓이겨진 채
열꽃, 별꽃을 피웠다 벽지에서 별은 병처럼, 유리병처럼 자라난다
길고 좁은 자궁으로 돌아가고 싶어 중얼거리며, 별을 잡아당긴다 별
똥 묻힌 꼬리로 눈을 찌른다 보라고, 좀 보라고 뭘 보냐고 기우뚱거
리는 사이 뾰족거리며, 미싱이 손등을 박는다 콕콕 잘도 돌아가는
미싱, 동생과 동생과 동생이 잣고 있다 불그락 파르락 아름다운 몸
들,
[감상]
미싱 돌아가는 속도감을 간결한 문장 혹은 반복적 어투로 형상화된 이미지가 돋보이는 시입니다. 화자가 겪는 자의식은 가혹한 가족사, 특히 부성의 폭력으로 인한 이 시대의 광기를 엿볼 수 있게 합니다. 결국 기계화된 상징의 '미싱'과 광기 어린 어른들의 세계가 현실을 억압으로 다스리고 있음을 폭로하는 셈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궁'은 여성이라는 생물학적 관점 너머 절대적이고 이상적인 표상에 넌지시 걸쳐 있습니다. 미싱 바늘이 피륙에 박히는 순간 짓이겨지는 형상이 눈에 선하군요. 여하간 성과 육체, 폭력의 문제를 여성적 상상력으로 발견해낸 '차이'가 느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