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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서랍 - 강연호

2002.05.24 10:27

윤성택 조회 수:1408 추천:150

『비단길』 / 강연호/ 세계사



        마음의 서랍
            
        이제는 완전히 지워버렸다고 자신했던
        아픈 기억들 바늘처럼 찔러올 때
        무수히 찔리면서 바늘귀에 매인 실오라기 따라가면
        보인다 입술 다문 마음의 서랍
        허나 지금까지 엎지르고 퍼담은 세월 적지 않아서
        손잡이는 귀가 빠지고 깊게 패인 흠집마다 어둠
        고여 있을 뿐 쉽게 열리지 않는다
        도대체 얼마나 뻑뻑한 더께 쌓여 있는 걸까
        마음의 서랍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힘에 겨워
        나는 어쩔 줄 모른다 거기 뒤죽박죽의 또 한 세상
        열면 잊혀진 시절 고스란히 살고 있는지
        가늠하는 동안 어디에선가 계속 전화벨이 울려
        아무도 수신하지 않는 그리움을 전송하는 소리 적박하다
        나야, 외출했나보구나, 그냥
        걸어봤어, 사는 게 도무지 강을 건너는 기분이야,
        하염없이 되돌아오는 신호음에 대고 혼자 중얼거리듯
        우두커니 서서 나는 마냥 낯설기만 한
        마음의 서랍 끝내 열어보지 못한다
        아무래도 외부인 출입금지의 팻말 걸린 문 앞에
        서성대고 있다는 느낌이다 아니 그보다는
        대낮에도 붉은 등 켜고 앉아 화투패 돌리며
        쉬어가라고 가끔 고개 돌려 유혹하는 여자들의 거리에
        와 있는 것만 같아 안절부절이다 순정만화처럼
        고만고만한 일에 울고 웃던 날들은 이미 강 건너
        어디 먼 대양에라도 떠다니는지
        오늘 풍랑 심하게 일어 마음의 서랍 기우뚱거리면
        멀미 어지러워 나도 쓸쓸해진다 언젠가
        뭘 그렇게 감춘 것 많냐고 속 시원히 털어놓으라고
        나조차 열어보지 못한 마음의 서랍
        우격다짐으로 열어본 사람들 기겁하여 도망치며 혀차던

        마음의 서랍은 서럽다
    


[감상]
누구에나 마음의 서랍이 있겠지요. 그 서랍을 열어보기가 엄두가 나지 않을까, 허겁지겁 집어넣고 잊어버렸던 아득한 기억들. 그러다 열어보면 고구마 순처럼 딸려 나오는 이름들. 그러나 중요한 것이 추억은 공유할 대상이 있을 때에만 존재가치가 있는 법입니다. 이 시는 그런 마음의 서랍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서랍"과 "서럽"과의 관계, 참 묘하게도 닮아 보이네요. 오늘은 그 서랍에 무엇을 넣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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