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없는 기억」/ 김일영/ 『현대문학』2003년 4월호
얼굴 없는 기억
마당에 고인 물속 하늘이 할마이 치마색 같네요
고인 물은 누군가를 담고 싶은지 정오의 햇빛을 견디고 있어요
비가 그친 지 한참인데
문을 닫지 마세요
날이 저물고 고인 물이 달빛을 삼키며 스스로 빛을 만들고 있어요
내 가슴팍을 자꾸 토닥거리지 마세요
마당 건너 젖은 파도 소리가 거기 녹음되고 말겠어요
언젠가 그 소리들이 날 잠 못 들게 할지 몰라요
오늘밤도 오줌발을 세우는 꿈이
뒤꼍 팽나무 가지에 걸리면 어떡하죠
별이 아침이면 어디로 가나요
무슨 얘기라도 해주세요
저 올빼미 울음소리를 지워주세요
한숨 소리 마루를 건너 바다에 빠져 가라앉고
살이 베인 바람이 전선줄 밑으로 울고 가네요
이제 베란다 문을 닫아 벽을 만들어야겠어요
눈을 감으면 간신히 어둠을 밀어낸 백열등 아래서
내 가슴을 토닥이며 내려다보실 건가요
파도 소리가 넓적하게 오려져 출렁이고 있을 뿐
보리와 옥수수를 익히는 무수한 햇빛들이
문밖에 다가와 얼굴 없이 서 계시는군요
[감상]
이 시가 끌리는 이유는 어조에서 오는 애잔함 때문인가 봅니다. 이 시에서 화자가 말을 건네는 대상은 아무래도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 사람이겠지요.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 할머니를, 화자가 기억해 내고 있는 것은 삶의 소소함까지 고해할 수 있는 대상으로 삼았던 것은 아닐까요. 나나 당신이나 성인이지만 가끔씩 어리광이나 투정을 부리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 하느님에게 '올빼미 울음소리'를 지워달라고 기도하기는 어쩐지 미안한 일이고요. 한번쯤 이런 어투로 詩를 써보는 것도 괜찮을 듯 싶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