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무의지의 수련, 부풀었다 - 김이듬

2007.01.19 11:35

윤성택 조회 수:1146 추천:143

《별 모양의 얼룩》/ 김이듬/ 《시작》(2005)


        무의지의 수련, 부풀었다

        신주쿠공원의 수련은 극단적이다
        히스테릭한 여자처럼 보일 수 있다
        갈기갈기 찢긴 얼굴로 치올라온다
        두 송이 수련은 마주보고 서른 셋 단검을 꽂으려 한다
        몸을 묶인 채 끌려갔을 때 희미한 빛조차 없던 방
        질퍽한 흙바닥을 납작 기어야 했다
        그런 데가 있었다 땅이 흔들리며 가라앉았다
        두세 번이 아니라 반복되고 또다시
        내가 잠시 비운 사이에 너 움직이면 알지?
        일본 남자의 칼은 길지 않았다
        신주쿠 검붉은 수련은 늪 속의 뿌리를 모른다
        나는 재빨리 유리 천장에 얼굴을 처박았다
        분간할 수 없이 햇볕은 깨뜨려졌다
        수련은 육중한 수면의 문을 대가리로 뚫고 올라온다
        파편으로 찢어발겨진 꽃잎들이 수련을 완성한다


[감상]
마츠다 미치코 작가의 ‘여자고교생 유괴사육사건‘ (1994년)이란 소설이 있습니다. 일본의 한 40대 남자가 여고생을 납치해 감금한 충격적인 실화 사건을 소재로 해서 일본에서는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그 후 <신주쿠 여고생 납치사건>이란 영화로도 만들어졌습니다. 내용인즉슨, 조깅을 하던 순백의 여고생이 손발이 묶인 채 눈을 뜬 곳은 어둡고 낯선 방입니다. 그리고 시종일관 영육이 일치된 완전한 사랑을 유괴로 이루려 하는 비틀린 로맨스를 보여줍니다. 이 시는 이렇게 영감을 얻어 <수련>이 피는 과정과 납치사건을 병치 시켜 의미를 확장시킨 것 같습니다. <그런 데가 있었다 땅이 흔들리며 가라앉았다 / 두세 번이 아니라 반복되고 또다시>에서 보이는 반복적인 행위 암시, 그리고 탈출을 위해 몸부림치는 모습이 <나는 재빨리 유리 천장에 얼굴을 처박았다>로 형상화됩니다. 손발이 묶인 몸으로 유리창을 얼굴로 깨고 밖으로 나가고자 할 때의 고통을 생각하면 수련은 가히 <파편으로 찢어발겨진 꽃잎들>이겠지요. 몇 군데 모호한 표현과 엮인 이 시를 읽고 있으려니, 에로스(자기보존 충동)와 타나토스(죽음 충동)라는 프로이트의 오래된 짝패를 뒤섞어 놓았다는 <신주쿠 여고생 납치사건> 영화평을 옮겨적고 싶었습니다.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171 합체 - 안현미 2010.01.06 1029 146
170 밤의 능선은 리드미컬하다 - 문세정 2008.01.29 1328 146
169 물의 베개 - 박성우 [1] 2007.04.25 1307 146
168 얼굴 없는 기억 - 김일영 2003.04.10 1095 146
167 공중의 시간 - 유희경 2008.12.16 1526 145
166 녹색에 대한 집착 - 정겸 2007.06.08 1354 145
165 검은 편지지 - 김경인 2007.07.24 1159 144
164 저녁에 이야기하는 것들 - 고영민 [2] 2008.06.17 1897 143
» 무의지의 수련, 부풀었다 - 김이듬 2007.01.19 1146 143
162 검은 젖 - 이영광 2008.02.12 1221 141
161 바람막이 - 신정민 [2] 2007.06.13 1303 141
160 사하라의 연인 - 김추인 2011.02.16 1222 140
159 벽 - 심인숙 2011.04.14 2146 139
158 흩어진다 - 조현석 2009.11.10 928 139
157 2008신춘문예 당선작 모음 [5] 2008.01.09 1917 139
156 안녕 - 박상순 [4] 2007.06.20 1784 139
155 2010신춘문예 당선작 모음 2010.01.05 1349 138
154 가을비 - 신용목 [1] 2007.08.11 1959 138
153 어도 여자 - 김윤배 2007.06.07 1083 138
152 하늘 위에 떠 있는 DJ에게 - 이영주 2011.03.03 1352 1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