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다, 염소》 / 조현석 (1988년 《경향신문》으로 등단) / 현대시시인선 80
흩어진다
끝도 안 보이는 길을 따라
처음에는 빠르게, 하지만 지금은
주마간산(走馬看山) 식으로
무심히 지나치는
무거운 풍경이 펼쳐진 땅의 시간을
벗어난다, 딱딱한 구름 위 걷듯
걸어가고 걷고, 또 걸어갈수록
그대와 함께 한 첫 밤은 점점 멀어진다
밤은 깊을 대로 깊어지고
키 작은 가로등 조는 듯… 불빛 희미한데
이미 수없이 지나쳤기에
떠오르는, 형체도 그림자도 없는
그대에게 가는 길
갈수록 비좁아진다, 여긴 바람 센 골목
그 길 끝은 한바탕 전쟁 치러진
군데군데 부서져 내리고 허물어진
건물들과 담벼락들, 아이고… 폐허인 듯
그 너머로 숭숭 구멍 난
얼굴 내민 나뭇잎… 구멍 사이로
멀리, 힘없이, 손 흔들고 서 있는 나
가고 싶지 않아도…, 갈 수밖에 없었던
질질 끌리듯, 힘들어하며 갔던
길… 걸어도 그저 헛발만 내딛고
제대로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
친친 미련에 묶인 채 끌려가는
길, 갈래갈래 흩어진다
[감상]
과거가 되어버린 한때의 그곳으로 가기 위한 방법은 시간을 거슬러 회상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곳은 너무 멀어서 매번 가던 그 길도 이제는 ‘군데군데 부서져 내리고 허물어진’ 것들뿐입니다. 이 시를 읽다보면 ‘그대’와 이별한 그 기억에서 얼마나 힘들게 멀어져 왔는지에 울림이 전해져옵니다. 인생에 있어 같은 곳에 계속 머무를 수는 없습니다. 또 그곳에서 그대로 서 있는 상대도 있지 않습니다. 모두 시간이라는 경로를 따라 그곳에서 떠나와야 합니다. 기쁨과 슬픔, 기회와 불행… 시인은 이러한 길 뒤에 남겨진 것들을 연민의 시선으로 애잔하게 뒤돌아봅니다. 우리에게 영혼이 있는한 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그 길을 잊었다고 다짐해도, 불현듯 그 길에 들어서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대를 잊을까봐 ‘걸어도 그저 헛발만 내딛고/ 제대로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우리는 지금, 다른 인연들로 쓸쓸히 흩어지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