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등에 그려진 사내」 / 김승일 (2007년 『서정시학』으로 등단 / 《서정시학》 2007년 여름호
비상등에 그려진 사내
비상등 속에 한 사내가 산다
문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한 채
달려가다가 멈춘 포즈로 비상등 안에 서 있다
몸통과 얼굴은 온통 단색이다
이목구비에 이름만 남은 사내
잠깐씩 열리는 비상구를 감지할 뿐
혼자서 불타는 문턱을 밟은 기억이 없다
응급침대 바퀴보다 더 많이 붙은 사람들이
사내를 여기까지 굴려왔을 것이다
문은 보이지 않고
사내의 겨드랑이 안쪽에서 가족들의 얼굴이 화라락 타오른다
자잘한 혈관부터 뜨거워진다
사내는 비명을 지르며
붕대처럼 감긴 휴지를 어둠 속에 던져 넣는다
그 좁은 길을 따라
혼자서 문을 나선다
늦은 밤에도 타오르는 중환자실
비상등 안에서
탈출을 시도하는 한 사내가 다리를 쳐든다
살 속에서 불빛이 저려온다
[감상]
어느 빌딩을 가도 존재하는 사내, 그러나 쉽게 흔하게 잊혀지는 사내. 평범한 일상에 비할 때 비상등에 그려진 사내는 이처럼 안과 밖을 통하게 하는 상징일 뿐입니다. 무료하기 짝이 없는 세상에게 있어서 그의 의미는 소외와 다를 바 없습니다. 이 시는 그러한 사내에게 인격과 개성을 부여하고 삶의 서사로 충만케 합니다. 어느 절박한 상황에 이르면 사내의 <이목구비>로 시선이 몰려갈 것이고, 사람들은 사내와 같은 포즈로 아우성거릴 것입니다. 흔히 접하는 소재에서 시적 포인트를 찾아내는 영매와 같은 존재가 시인의 천성이겠다 싶은 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