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골목의 저 끝> / 정은기 (2008년 『한국일보』로 등단) / 《다층》2009년 봄호
이 골목의 저 끝
모과나무 밑에서 그리워하는
이 골목의 저 끝으로 나는 아직 가보지 못했다
저 끝에는 이곳과 다른 계절이 머물고
시간은 누구나 마음속에 숨겨둔 여울을 지나 흘러간다
그곳에 닿으면 라디오 디제이에게 편지를 쓰겠다
양탄자처럼 음악을 타고 날아갈 수 있도록
푹신한 소파에 기대어 나는 기회를 엿본다
지문들이 서로 엉키어
빨판처럼 담을 타고 벽을 넘어 갈 때
팔을 뻗어 손가락으로 가지를 드리울 것이다
모과를 주렁주렁 매달고
이 골목의 저 끝까지 모과향 날려 보내리
갈비뼈를 따라 지퍼를 열자 뼈들이 솟는다
몇 해 전 가을에 이곳에 섰지만
담장 너머로 열매를 떨어뜨려 본 적
한 번도 없으니, 땅 속으로 뿌리를 뻗어도
이 골목의 저 끝에는 닿을 수 없으니
슬픔에 찬 옹이가 목구멍으로 올라오면
나는 발뒤꿈치를 들고 멀리 뱉어 버린다
온몸을 흔들어도 닿을 수 없는
이 골목의 저 끝으로
[감상]
모과의 향기는 이 골목의 저 끝으로 갈 순 있어도, 모과나무는 일생을 한 곳에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시에서의 ‘나’는 모과나무일수도 모과나무를 바라보는 또 다른 화자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 되든 이 골목의 저 끝으로 가고 싶은 열망은 이 시의 주된 정조입니다. 나무의 의인화가 곳곳에 겹쳐지면서, 나무인 듯 사람인 듯 그렇게 그리움이 깊어집니다. ‘손가락’, ‘갈비뼈’, ‘목구멍’은 몸의 구성이지만 모과나무를 이해하는데 바쳐지는 수사들입니다. 너무 쉽게 읽히지도 그렇다고 난해하지도 않은 그 중간에, 알싸하게 시고 떫은 감각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