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에 닿지 않는 슬픔》 / 이기선 (2003년 《시와반시》로 등단) / 문학의전당 시인선 75
숲
숲은 단단한 바위들의 냉정함을 보여 주어
나를 슬프게 했네
나뭇잎은 떨어진 자리에서 젖어만 갔네
바람이 불고 나면
이마의 땀 식은 자리는 쓸쓸하였네
잠시 걸음 멈춘 사이에도
햇살은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겨 가고
흐르지 않는 개울의 물 마른자리가
상처처럼 보였네
아팠던 자리도 길이 될 수 있음을 숲에서 보았네
숲 하나를 지나니 또 숲이 나오네
숲은 단단한 바위들의 냉정함을 보이지만
바위를 들춰 보면 젖은 흙이 나오네
누구나 제 몫의 슬픔을 깔고 사네
깊어질수록 보이지 않는 遠視(원시)의 거리에서
숲은 다만 고요해질 뿐
옹달샘 숲 속의 고인 물가에 앉네
새들은 노래하고 나무들은 다정하네
오랜 시간이 흐르고 흘러
마지막으로 가라앉는 앙금들의 조용함을 듣네
[감상]
숲에 대한 애잔하면서 감성적인 톤이 끌립니다. 풍경으로만 존재하는 숲을 감성의 촉수로 처연하게 감각해냈다고 할까요. 인간이라는 고독한 존재로서 소용되는 느낌들. 이를테면 냉정함, 슬픔, 쓸쓸함, 아픔, 다정, 조용함…들이 시 속에 아련하게 배여 있습니다. 완곡하게 명사화된 시어의 처리도 인상적입니다. ‘~함’이 담아내는 감정은 곁으로 흐르지 않고 소품처럼 문장에 다소곳이 배치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