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검은 비닐 가방

2006.02.15 09:32

윤성택 조회 수:1773 추천:55


        검은 비닐 가방

        사내는 느릿느릿 광장을 가로지른다
        발을 옮길 때마다 두 갈래로 비켜가는 행인들,
        벌어진 틈은 뒤편에서 엇물린다
        시계탑이 그림자를 바짝 당겨와 보도블록을 채워올 때  
        사내가 앙다문 이빨을 드러내며 웃는다
        길을 질질 끌고 오는 동안 슬픔 따위는
        맞물려놓은 단단한 가방처럼 닫아버렸다
        메슥거려 치미는 핏물을 뱉으며
        사내는 형형해진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본다
        그늘의 지퍼를 열면 내장이 비워진
        환한 뼈의 숲으로 가는 길이 있으리라
        튀어나온 광대뼈는 오후를 반사한다
        사내는 광장을 고스란히 기억하려는 듯
        디지털카메라로 찡그린, 웃긴, 입 벌린, 풍경을 저장한다
        이렇게 이별은 한낮의 그림파일이다
        대합실로 향할 때 주머니에서 신호음이 울린다
        우두커니 고개를 묻고 액정을 보다가
        휴대폰을 그대로 휴지통에 놓아버린다
        대합실 의자에 앉은 사내는 마지막 끝까지
        지퍼를 올리고 야전잠바의 깃을 세워
        의자 깊숙이 몸을 누인다 얇은 미소가
        사람들이 밀려왔다 밀려가는 사이 희미해져간다
        사내는 눈을 감는다
        막차가 떠났는데도 꼼짝하지 않는다
        지퍼 속으로 머리가 미끄러져간다


* 시집 《리트머스》(문학동네) 中

 

윤성택
1972년 충남 보령 출생
2001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 『리트머스』, 『감(感)에 관한 사담들』, 산문집 『그사람 건너기』.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공지 여행 2010.12.31 2041 135
공지 타인 2008.02.12 2337 112
공지 아틀란티스 2007.04.12 1947 56
공지 FM 99.9 2004.09.26 2424 85
공지 여전히 그대는 아름다운지 2004.12.15 2645 125
공지 탈수 오 분간 2004.06.01 2452 100
공지 로그인 2005.09.01 2316 84
공지 스트로 2003.09.18 2358 88
공지 후회의 방식 2005.03.18 1574 127
공지 장안상가 2004.06.03 2410 87
공지 대학병원 지하주차장 2004.02.28 1575 31
» 검은 비닐 가방 2006.02.15 1773 55
공지 농협창고 2006.07.27 1735 55
87 접속 secret 2006.07.27 4 0
86 오후 세 시 - 《시인》2007년 하반기 secret 2008.01.18 3 0
85 백석을 생각하는 밤 - [애지문학회] 2013년 8월 secret 2013.08.05 1 0
84 적목(赤目) 外 4편 - [시와사람] 가을호 secret 2013.08.05 1 0
83 봄꽃 外 4편 - [서시] 2013년 여름호 secret 2013.08.05 1 0
82 月刊 - [문학사상] 2013년 7월호 secret 2013.08.05 1 0
81 꽃의 음역 外 1편 - [미네르바] 2013년 가을호 secret 2013.08.05 1 0
80 바닷가 불빛 外 1편 - [현대시학] 2013년 6월호 secret 2013.08.05 1 0
79 감정의 황혼 外 1편 - [딩아돌하] 2013년 봄호 secret 2013.08.05 1 0
78 붉은 폭설 外 1편 - [시와경계] 2013년 봄호 secret 2013.08.05 1 0
77 도시인 - 『시와표현』 2012년 가을호 secret 2013.01.09 1 0
76 입김 - [시마] 2024년 봄호 산문 연재 secret 2024.03.28 0 0
75 보호되는 휴일 - [시산맥] 2024년 봄호 secret 2024.01.05 0 0
74 가을 우체국 - [시마] 2023년 가을호 산문 연재 secret 2023.08.04 0 0
73 기다리는 사람은 기다릴 때까지 온다 - [시인시대] 2023년 가을호 secret 2023.07.11 0 0
72 냉장고 - [시마] 2023년 여름호 산문 연재 secret 2023.05.12 0 0
71 봄봄봄 - [시마] 2023년 봄호 산문 연재 secret 2023.02.07 0 0
70 목련 플래시 - [시와편견] 2023년 봄호 secret 2023.01.16 0 0
69 산방에서 일주일 - [시마] 2022년 겨울호 산문 연재 secret 2022.11.11 0 0
68 나귀에 실려 - [미네르바] 2022년 겨울호 secret 2022.10.19 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