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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통속으로 취했거늘

2024.02.01 20:57

윤성택 조회 수: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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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동 거릴 거닐다 낯선 골목으로 빠져나온 적 있다. 밤안개가 꼈는지도, 멀리 성당에서 종소리가 들렸는지도 모른다. 그 앞이 관훈동 동방싸롱이었다. 아치형 붉은 벽돌 붙은 간판에 이끌리듯 들어갔으니. 거기서 박인환을 만났고 곧이어 김수영이 합석하게 되었다. 박인환이 자네가 여기서 느끼는 감정을 읊어보게라고 해서,

 

'한 잔 술을 목마에게 축이고 나머지를 그저 가슴에 붓는다. 인생이 통속으로 취했거늘 술병은 뭐가 서러워 청춘을 쓰러뜨리는가'

 

조용조용 읊조렸다. 그러자 박인환은 술병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아련히 비겁한 현실주의자라는 말이 들렸다. 김수영에게 한 말인지 내게 한 말인지 아득했다. 그리고 깨어났다. 길바닥에 나와 보니 외국인이 모자 하나 놓고 바이올린을 켜고 있었다.

 

꿈에서 깨어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를 찾아보았다. 여기 단어들이 꿈속까지 마실오다니.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한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목마는 하늘에 있고

가을 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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