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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편지 그리고 카메라 6

2011.01.18 14:48

윤성택 조회 수:281 추천:4


캘린더를 넘겨본다. 나를 앞서간 몇몇 약속이 다음 달 숫자에 메모되어 있다. 결정짓고 있다는 듯, 나는 점점 약속으로 이뤄진 미래를 관통한다. 약속대로 사랑하고 약속대로 행복하고 그렇게 나는 약속을 지키다가 늙어갈 것이므로.  그러니 앞으로 남은 날들 어딘가의 우연조차 우주의 질서에 의한 수순이면 어쩔 것인가. 돌이켜보면 약속을 해놓고 둘 다 잊어버린 시간에 우리는 살고 있다. 여기서 더 낮아지면 생각이 남루해지고 여기서 더 높아지면 쓸쓸함이 증발한다. 외투 깃을 파고드는 서늘한 기억들에게 코끝을 발갛게 만들던 황망한 공기들에게 영하의 기온은 추억의 대기를 만든다. 걸어왔던 길을 끌어와 갓길로 흩어지는 낙엽처럼 한때 우리가 지나쳤던 시간은 모두 바람 속이었을 것이다. 이 저녁의 비가 언젠가 눈발로 네게 내렸다는 것을 안다. 공중에서 아주 천천히 낙하하는 순간 순간이 누대의 일생이 되고 그 일생을 받아들이기 위해 오늘 눈은 폭설이어도 좋다. 영하 6도. 채널을 고정하듯 같은 온도의 날들이 교신되어 온다. …… 가로등 아래로 그 붉은 가로등 아래로 공간이 열리고 점점이 정체를 이뤄가는 것들, 그렇게 오늘의 기온이 나를 선택한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계절은 갔다. 영하, 그 겸손한 법칙. 사람을 이해하는 일이란 그의 방식으로 진실해보는 것이다. 그리고 잠시 그의 눈으로 나를 돌아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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