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말 마시라.
나는 지금 이 밤의 온도를 얼음 속에서 적고 있을 뿐이다.”
- 시인 윤성택의 기억과 추억에 관한 사진 에세이
“나는 아직도 밤이 일생을 다운로드 하는 버퍼링(buffering)이라 생각한다. 밤새 침대에서 전송과 충전을 마친 사람은 생생하게 낮을 저장한다. 그러나 한 번도 폴더에 들지 않는 인연이 어느 날 나를 다운시키기도 한다. 뻑 나듯 현실이 둔기가 되는 날, 전원을 켜둔다. 그때는 인생이 한여름밤이다.”
시를 이해해보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부질없는 일이 따로 없는 이유는 시인이 세상 사람들과 다른 언어를 구사하기 때문이다. 같은 세상을 바라보면서 시인은 본능적으로 매 순간 은유한다. 시인의 눈으로 바라본 일상의 소소한 일들이 시어를 빌어 다시 태어날 때 그곳은 이미 여기와는 다른 세상이다. 이해하지 말고 느껴야 하는 그 세계가 우리 곁에 있지만 가깝고도 참 낯설다.
“살아간다는 건 이해와 오해를 뒤집어쓴 짐승에게 내 이름을 던져주는 것이다.”
2001년 ‘수배전단’으로 문학사상을 통해 등단한 시인은 이미 두 권의 시집을 냈다. 그리고 이제 시인은 사진이 있는 에세이 《그 사람 건너기》를 통해 시어로 표현하지 못했던 고충을 산문으로 털어놓는다.
“몇 시간 째 아무것도 적지 못하고 단 한 줄의 글을 남기지 못하고, 이런저런 궁색한 상상만 하다가 컴퓨터를 꺼버릴 때가 있다. 목울대에서는 무슨 말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데 왼쪽 가슴께가 결려서 기지개만 두어 번하다가 멈추고 마는 것이다. 그런 날은 오후가 겹겹이 포개져 시간 속을 겉돈다. 마음은 버스 뒷좌석처럼 적막해진다.”
데뷔 5년 만에 첫 시집 《리트머스》를 펴내 호평을 받았던 시인은 다시 7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야 두 번째 시집 《감에 관한 사담들》을 세상에 내놓았다. 왜 그토록 오랜 시간이 걸렸을까?
“시는 단어와 단어 사이의 간극에 절박함을 데려와 문장으로 일생을 살게 한다. 그러나 종종 활자들이 와르르 무너져 폐허가 되는 내면도 있다. 나는 늘 그 부실이 두렵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간극은 어떤가. 진실함과 절박함이 오래 마주하다 진실이 떠나고 나면, 절박은 저 혼자 사람과 사람 사이 귀신이 된다. 스스로 정체성을 잃은 채, 이기와도 욕망과도 내통하며 사람을 홀린다. 진실이 있지 않은 절박은 더 이상 사람이 될 수 없다. 시가 될 수 없다. 그러니 나의 이 절박은 무엇인가.”
흑백 톤의 절제된 사진 혹은 오롯한 컬러의 사진들이 간간이 시인의 절박한 마음을 글 대신 영상으로 전해준다. 시인이 털어놓은 일상의 사소한 사연들 속에는 사람에 대한 기억이 있고 추억이 있지만 역시나 구체적이지는 않다. 은유의 세상에서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독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윤성택 시인의 사진 에세이는 산문이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그래서, 시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