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회 시현실 신인상 수상작/ 최을원/ 『시현실』 2002 가을호
용설란
용설란에서 사내 하나 걸어 나온다
작은 체구에 다리를 저는 초로의 멕시코 사내
가구 공장 뜰에서 사포질, 니스칠하며
낡은 모포처럼 웃던 그 사내
그가 대패질을 할 때면
카리브 해안에서 경기도 마석 변두리까지
좁다란 길이 돌돌 말렸다가 떨어졌다
미간의 협곡엔 안데스 산정 늙은 콘돌이 둥지를 틀고
잉카의 오랜 전설 컥컥 거릴 때
굴곡 많은 사연들이 얼굴을 지나가고
움푹한 눈에 하나둘 들어서던 이국의 저녁들
야심한 다릿목에 나앉아 있던 나직한 메스티조의 노래
문득, 떠오르던 태양과 사막과 선인장과 용설란
천둥 사납던 날 그 노래, 모진 물살에 쓸려 갔다
내가 生의 한 국경을 건너왔을 무렵
하루의 끝에 서 있던 그 사내
천장 빼곡이 용설란 밭은 펼쳐지고
용설란 손끝에 찔려 밤의 곳곳이 쓰라리면
데낄라 노란 술병 들고 나타난 그 사내
데낄라, 데낄라, 데낄라
외치다가 지구본 위를 절룩이며 갔다
경도와 위도의 교차점에 찍힌 그의 발자국
천장에 대팻밥 가득 남기고
먼 회귀선 아래로 가고 있었다
[감상]
무엇보다도 놀라운 것은 가구공장에서 일하는 외국인 근로자를 쫓아가는 시선입니다. 선인장과 비슷한 용설란 밭에서 걸어오는 멕시코 근로자를 보며, 먼먼 그가 살았던 땅을 떠올리는 상상력이 시적 환기를 이뤄냅니다. 특히 "대패질"에서 비롯되는 비유가 인상적이네요. 우리도 먼 사우디로 팔려가던 시절이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