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용설란 - 최을원

2002.10.08 11:36

윤성택 조회 수:1120 추천:218

  제15회 시현실 신인상 수상작/ 최을원/ 『시현실』 2002 가을호


        용설란


        용설란에서 사내 하나 걸어 나온다
        작은 체구에 다리를 저는 초로의 멕시코 사내
        가구 공장 뜰에서 사포질, 니스칠하며
        낡은 모포처럼 웃던 그 사내
        그가 대패질을 할 때면
        카리브 해안에서 경기도 마석 변두리까지
        좁다란 길이 돌돌 말렸다가 떨어졌다
        미간의 협곡엔 안데스 산정 늙은 콘돌이 둥지를 틀고
        잉카의 오랜 전설 컥컥 거릴 때
        굴곡 많은 사연들이 얼굴을 지나가고
        움푹한 눈에 하나둘 들어서던 이국의 저녁들
        야심한 다릿목에 나앉아 있던 나직한 메스티조의 노래
        문득, 떠오르던 태양과 사막과 선인장과 용설란
        천둥 사납던 날 그 노래, 모진 물살에 쓸려 갔다
        내가 生의 한 국경을 건너왔을 무렵
        하루의 끝에 서 있던 그 사내
        천장 빼곡이 용설란 밭은 펼쳐지고
        용설란 손끝에 찔려 밤의 곳곳이 쓰라리면
        데낄라 노란 술병 들고 나타난 그 사내
        데낄라, 데낄라, 데낄라
        외치다가 지구본 위를 절룩이며 갔다
        경도와 위도의 교차점에 찍힌 그의 발자국
        천장에 대팻밥 가득 남기고
        먼 회귀선 아래로 가고 있었다  



[감상]
무엇보다도 놀라운 것은 가구공장에서 일하는 외국인 근로자를 쫓아가는 시선입니다. 선인장과 비슷한 용설란 밭에서 걸어오는 멕시코 근로자를 보며, 먼먼 그가 살았던 땅을 떠올리는 상상력이 시적 환기를 이뤄냅니다. 특히 "대패질"에서 비롯되는 비유가 인상적이네요. 우리도 먼 사우디로 팔려가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311 나는 푸른 트럭을 탔다 - 박찬일 2002.10.10 1112 232
» 용설란 - 최을원 2002.10.08 1120 218
309 집 - 이기철 2002.10.07 1447 211
308 하수구의 전화기 - 김형술 2002.10.04 1025 204
307 냇물이 풀릴 때 - 박옥순 2002.10.01 1186 209
306 섬 - 최금진 2002.09.30 1554 219
305 달팽이가 지나간 길은 축축하다 - 박성우 2002.09.27 1268 225
304 가을날 - 이응준 2002.09.26 3601 259
303 숨쉬는 일에 대한 단상 - 이가희 2002.09.25 1218 219
302 음암에서 서쪽 - 박주택 2002.09.24 1086 240
301 뒤통수- 장승리 2002.09.23 1140 208
300 단추 - 박일만 2002.09.19 1297 192
299 산은 넘는 자의 것이다 - 정숙자 2002.09.18 1159 205
298 러브 어페어 - 진은영 2002.09.17 1298 194
297 유년 - 정병근 2002.09.16 1060 189
296 다비식 - 신용목 2002.09.13 1071 219
295 사진1 - 이창호 2002.09.09 1230 190
294 적(跡) - 김신용 2002.09.06 1013 172
293 쿨럭거리는 완행열차 - 송종규 2002.09.05 1062 179
292 심야 배스킨 라빈스 살인사건 - 조동범 2002.09.03 1163 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