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공중의 유목 - 권영준

2003.02.04 11:52

윤성택 조회 수:891 추천:160

「공중의 유목」/ 권영준/ 『현대시』2003년 2월호



        공중의 유목


        지난날 내 몸은
        초원을 떠돌던 나신이었다
        부패한 광선들이
        내장의 깊은 뿌리까지 문화의 종근을 뻗어 내렸을 때
        나는 죽음을 거슬러 오르기 시작했다
        내 혈관에 돌고 있는 농도 짙은 방부제,
        허공의 심장에서 추출해 낸
        영생불멸의 DNA를 개발해 낼 때까지
        나는 공중의 뱃속에서 무럭무럭 자라났다
        내가 애타게 일궈온 활자들이
        내가 떠받들어 왔던 문명들이
        이곳의 먼지 한 톨보다 가벼운 것이었을 때
        내 치욕뿐인 온 생은 짙은 구름떼를 몰고 사라졌다
        한없이 누추한 지상의 시간들
        공중에서의 잠은 지상의 잠보다 한 뼘 더 깊다
        그러나 공중의 유목 또한 허망하게
        온 생을 몰고 지나가는 것이니
        그곳에 가고 싶은 자
        공중의 유민이 되어 허공을 화전(火田)하라
        피도 황금도 다 버려라
        철저히 혼자가 되어
        허공을 사랑하라
        다시는 욕된 지상으로 내려올 수 없도록



[감상]
이 시는 죽음 뒤 영혼의 生을 남다른 상상력으로 보여줍니다. 시적 화자의 목소리는 절대 존재로서의 통찰을 보여줌과 동시에 시인의 내면을 연결시켜주는 설정입니다. 사실 누구든 죽고 나면 '피도 황금도' 필요치 않으며, '허망하게/ 온 생'이 지나갈 뿐입니다. '허공을 사랑하라' 강제적인 명령은 지상의 욕망이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공중에서 유목이 이뤄진다는 발상, 참 인상적이네요.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1191 木도장 - 손택수 2001.06.01 1537 350
1190 흉터 속에는 첫 두근거림이 있다 - 정영선 2001.07.12 1621 337
1189 우체통 - 이진명 2001.04.11 2539 334
1188 트렁크 - 김언희 2001.04.11 1758 332
1187 넝쿨장미 - 신수현 [1] 2001.04.07 2047 332
1186 ㅎ 방직공장의 소녀들 - 이기인 2001.04.24 1669 331
1185 나무에게 묻다 - 천서봉 2001.06.11 1782 327
1184 내 영혼은 오래 되었으나 - 허수경 2001.04.16 2126 327
1183 날아가세요 - 허연 2001.04.12 2172 327
1182 희망은 카프카의 K처럼 - 장석주 2001.06.28 1650 325
1181 전망 좋은 방 - 장경복 2001.04.23 1889 325
1180 백신의 도시, 백신의 서울 - 함민복 2001.05.17 1380 324
1179 간이역 - 김선우 [2] 2001.04.17 2218 324
1178 우울한 샹송 - 이수익 2001.04.13 1876 324
1177 빛을 파는 가게 - 김종보 2001.07.16 1695 322
1176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 - 장석남 [1] 2001.04.28 1759 321
1175 펜 노동자의 일기 - 이윤택 2001.04.26 1661 321
1174 그대들의 나날들 - 마종하 2001.06.29 1524 319
1173 장화홍련 - 최두석 2001.04.30 1504 319
1172 봄의 퍼즐 - 한혜영 [2] 2001.04.03 2356 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