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중의 유목」/ 권영준/ 『현대시』2003년 2월호
공중의 유목
지난날 내 몸은
초원을 떠돌던 나신이었다
부패한 광선들이
내장의 깊은 뿌리까지 문화의 종근을 뻗어 내렸을 때
나는 죽음을 거슬러 오르기 시작했다
내 혈관에 돌고 있는 농도 짙은 방부제,
허공의 심장에서 추출해 낸
영생불멸의 DNA를 개발해 낼 때까지
나는 공중의 뱃속에서 무럭무럭 자라났다
내가 애타게 일궈온 활자들이
내가 떠받들어 왔던 문명들이
이곳의 먼지 한 톨보다 가벼운 것이었을 때
내 치욕뿐인 온 생은 짙은 구름떼를 몰고 사라졌다
한없이 누추한 지상의 시간들
공중에서의 잠은 지상의 잠보다 한 뼘 더 깊다
그러나 공중의 유목 또한 허망하게
온 생을 몰고 지나가는 것이니
그곳에 가고 싶은 자
공중의 유민이 되어 허공을 화전(火田)하라
피도 황금도 다 버려라
철저히 혼자가 되어
허공을 사랑하라
다시는 욕된 지상으로 내려올 수 없도록
[감상]
이 시는 죽음 뒤 영혼의 生을 남다른 상상력으로 보여줍니다. 시적 화자의 목소리는 절대 존재로서의 통찰을 보여줌과 동시에 시인의 내면을 연결시켜주는 설정입니다. 사실 누구든 죽고 나면 '피도 황금도' 필요치 않으며, '허망하게/ 온 생'이 지나갈 뿐입니다. '허공을 사랑하라' 강제적인 명령은 지상의 욕망이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공중에서 유목이 이뤄진다는 발상, 참 인상적이네요.
좋은 시들을 옮겨다 놓으시고 감상평까지 써내려 가는 글들은
모두가 빛이 납니다. 눈이 부시도록...
감사한 마음과 함께 삶에서나 시에서나 건강 부족함이 없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