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 발자국』/ 손택수/ 창작과 비평사
범일동 블루스
1
방문을 담벼락으로 삼고 산다. 애 패는 소리나 코고는 소리, 지지고 볶는 싸움질 소리가
기묘한 실내악을 이루며 새어나오기도 한다. 헝겊 하나로 간신히 중요한 데만 대충 가리
고 있는 사람 같다. 샷시문과 샷시문을 잇대어 난 골목길. 하청의 하청을 받은 가내수공
업과 들여놓지 못한 세간들이 맨살을 드러내고, 간밤의 이불들이 걸어나와 이를 잡듯 눅
눅한 습기를 톡, 톡, 터뜨리고 있다. 지난밤의 한숨과 근심까지를 끄집어내 까실까실하게
말려주고 있다.
2
간혹 구질구질한 방안을 정원으로 알고 꽃이 피면 골목길에 퍼뜩 내다놓을 줄도 안다.
삶이 막다른 골목길 아닌 적이 어디 있었던가, 자랑삼아 화분을 내다놓고 이웃사촌한 햇
살과 바람을 불러오기도 한다. 입심 좋은 그 햇살과 바람, 집집마다 소문을 퍼뜨리며 돌
아다니느라 시끌벅적한 꽃향, 꽃향이 내는 골목길.
3
코가 깨지고 뒤축이 닳을 대로 닳아서 돌아오는 신발들, 비좁은 집에 들지 못하고 밖에
서 노독을 푼다. 그 신발만 세어봐도 어느 집에 누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는지, 어느 집에
자고가는 손님이 들었고, 그 집 아들은 또 어디에서 쑥스런 잠을 청하고 있는지 빤히 알
아맞힐 수 있다. 비라도 내리면 자다가도 신발을 들이느라 샷시문 여는 소리가 줄줄이 이
어진다. 자다 깬 집들은 낮은 처마 아래 빗발을 치고 숨소리를 낮춘 채 부시럭부시럭거린
다. 그 은근한 소리, 빗소리가 눈치껏 가려주고 간다.
4
마당 한 평 현관 하나 없이 맨몸으로 길을 만든 집들. 그 집들 부끄러울까봐 유난히 좁
다란 골목길. 방문을 담벼락으로 삼았으니, 여기서 벽은 누구나 쉽게 열고 닫을 수가 있
다 할까, 나는 감히 말할 수가 없다. 다만 한바탕 울고 난 뒤엔 다시 힘이 솟듯, 상다리 성
치 않은 밥상 위엔 뜨건 된장국이 오를 것이고, 새새끼들처럼 종알대는 아이들의 노래소
리 또한 끊임없이 장단을 맞춰 흘러나올 것이다. 젖꼭지처럼 붉게 튀어나온 너의 집 초인
종 벨을 누르러 가는 나의 시간도 변함없이 구불구불하게 이어질 것이다.
[감상]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에 가보지는 않았지만 이 시를 읽다보면 한때 대학시절 자취했던 그 산동네인 것만 같아 가슴 한켠이 저려옵니다.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상상력을 잇대어 놓는 솜씨는 근래 젊은 시인 분들 중 남다른 영역을 차지하고 있는 시인입니다. 거칠지 않게 곳곳에 드러나는 직관이 감칠 맛 있게 배치됨으로서 긴 시임에도 불구하고 대단한 흡입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시를 공부하시는 분이라면 꼭 추천하고 싶은 시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