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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 - 이기성

2003.01.17 14:48

윤성택 조회 수:1414 추천:222

「산책」/ 이기성 / 『문학과사회』 2002년 겨울호



        산책
    

  아름다운 K, 오늘 아침 당신은 발등을 어른대던 그림자를 놓쳤다. 방
부 처리기한을 넘긴 건 사소한 부주의였을 뿐.  그러나 놈은 이미 눅눅
한 다리를 절뚝이며 오래된 터널을 지나 무쇠 다리를 건넜다.  수백 년
전부터 당신은 이 제국의 아들, 둥그런 탐조등 켜진  거리를 달려간다.
검은 안경 낀 이웃들에겐  골목을 돌아 산책 중이라고  말하고 싶을 테
지만, 그들의 시끄러운 망막은 쉴 새 없이 찍어댈 것이다. 급하게 휘갈
겨 쓴 서명 위에서 당신은 또 건들거릴 것이고  게으른 손가락과 덜 굳
은 변명도  남김없이 기록될 것이다.  그러니 낡은 문장을  더듬거리며
거대한 욕조 속에서 미끄러지던 새벽 훌쩍 집 떠난 검은 사슴은  내 것
이 아니라고 어떻게 변명을 할 텐가.
  K여, 허공에 매달린 창마다 불쑥 튀어나온 총구처럼 제국은  천 개의
눈을 반복한다.  욕조에 거꾸로 박힌 두 개의 다리가 고독하게  흔들릴
때, 둔탁하게 뭉쳐진 놈의 뿔이 흰 종이처럼  얇아진 당신을 찢으며 힘
껏 달려갔던가. 컹컹거리며 개들이 쫓아오고 가속 페달을 밟아 어두운
터널 속으로 달려가기 직전 당신은 조금 더듬거렸을지도 모르겠다. 눈
부신 백미러 속에서 새하얗게 빛나던 이빨.  지금 검은 사슴이  건너간
물에 엎드린  사내처럼 너무도 조용한 당신.  황혼의 욕조 속에서 팅팅
불은 당신의 몸을 건져내며 그들은 간단하게 멸종 이후의 삶을 요약할
것이다. 딱딱한 귓가에 매달린 웃음의 흔적,  손가락마다 찍혀 있는 검
은 바코드, 영원히 아름다운 K여, 제국은 당신을 사랑하다.
    
    

[감상]
이 시를 읽다보면 음습한 살인의 징후가 느껴집니다. 욕조에 K는 두 다리를 밖으로 내민 채 죽어 있고, 그 안에서 퉁퉁 불어 가는 시체. 그리고 도망자로 시선이 옮겨간 불안함. 그런 역설적인 상황이 '아름다운 K'를, '제국'을 연민의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만들고 있습니다. 밖은 연신 비가 내리고 있네요. 이 시 속에서처럼 어둡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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