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범일동 블루스 - 손택수

2003.02.14 15:26

윤성택 조회 수:1341 추천:159

『호랑이 발자국』/ 손택수/ 창작과 비평사



   범일동 블루스

1  
  방문을 담벼락으로 삼고 산다. 애 패는 소리나 코고는 소리, 지지고 볶는 싸움질 소리가
기묘한 실내악을 이루며 새어나오기도 한다.  헝겊 하나로 간신히 중요한 데만 대충 가리
고 있는 사람 같다.  샷시문과 샷시문을 잇대어 난 골목길.  하청의 하청을 받은 가내수공
업과 들여놓지 못한 세간들이 맨살을 드러내고,  간밤의 이불들이 걸어나와 이를 잡듯 눅
눅한 습기를 톡, 톡, 터뜨리고 있다. 지난밤의 한숨과 근심까지를 끄집어내 까실까실하게
말려주고 있다.

2
  간혹 구질구질한 방안을 정원으로 알고  꽃이 피면  골목길에 퍼뜩 내다놓을 줄도 안다.
삶이 막다른 골목길 아닌 적이 어디 있었던가,  자랑삼아 화분을 내다놓고 이웃사촌한 햇
살과 바람을 불러오기도 한다. 입심 좋은 그 햇살과 바람,   집집마다 소문을 퍼뜨리며 돌
아다니느라 시끌벅적한 꽃향, 꽃향이 내는 골목길.

3  
  코가 깨지고 뒤축이 닳을 대로 닳아서 돌아오는 신발들,  비좁은 집에 들지 못하고 밖에
서 노독을 푼다. 그 신발만 세어봐도 어느 집에 누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는지,  어느 집에
자고가는 손님이 들었고,  그 집 아들은 또 어디에서 쑥스런 잠을 청하고  있는지 빤히 알
아맞힐 수 있다. 비라도 내리면 자다가도 신발을 들이느라 샷시문 여는 소리가 줄줄이 이
어진다. 자다 깬 집들은 낮은 처마 아래 빗발을 치고 숨소리를 낮춘 채 부시럭부시럭거린
다. 그 은근한 소리, 빗소리가 눈치껏 가려주고 간다.

4
   마당 한 평 현관 하나 없이 맨몸으로 길을 만든 집들.  그 집들 부끄러울까봐 유난히 좁
다란 골목길.  방문을 담벼락으로 삼았으니,  여기서 벽은 누구나 쉽게 열고 닫을 수가 있
다 할까, 나는 감히 말할 수가 없다. 다만 한바탕 울고 난 뒤엔 다시 힘이 솟듯, 상다리 성
치 않은 밥상 위엔 뜨건 된장국이 오를 것이고, 새새끼들처럼  종알대는 아이들의 노래소
리 또한 끊임없이 장단을 맞춰 흘러나올 것이다. 젖꼭지처럼 붉게 튀어나온 너의 집 초인
종 벨을 누르러 가는 나의 시간도 변함없이 구불구불하게 이어질 것이다.



[감상]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에 가보지는 않았지만 이 시를 읽다보면 한때 대학시절 자취했던 그 산동네인 것만 같아 가슴 한켠이 저려옵니다.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상상력을 잇대어 놓는 솜씨는 근래 젊은 시인 분들 중 남다른 영역을 차지하고 있는 시인입니다. 거칠지 않게 곳곳에 드러나는 직관이 감칠 맛 있게 배치됨으로서 긴 시임에도 불구하고 대단한 흡입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시를 공부하시는 분이라면 꼭 추천하고 싶은 시집입니다.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391 한천로 4블럭 - 김성수 2003.03.05 1023 202
390 주먹 눈 - 전동균 2003.03.03 1075 186
» 범일동 블루스 - 손택수 [1] 2003.02.14 1341 159
388 묵음의(默音) 나날들 - 은 빈 2003.02.12 1004 158
387 수궁에서 놀다 - 박진성 2003.02.11 998 162
386 바람소리를 듣다 - 장만호 2003.02.10 1208 150
385 겨울잠행 - 손순미 2003.02.07 1143 178
384 1월의 폭설 - 홍신선 2003.02.06 979 182
383 새끼발가락과 마주치다 - 김사인 2003.02.05 1017 169
382 공중의 유목 - 권영준 [1] 2003.02.04 927 160
381 모든 꽃은 흔들리며 뿌리로 간다 - 강미정 2003.02.03 1144 169
380 참붕어가 헤엄치는 골목 - 김윤희 2003.01.29 1123 196
379 쓸쓸한 느낌 - 서지월 2003.01.28 1303 212
378 사랑한다는 것은 - 최정숙 2003.01.24 1626 187
377 무덤생각 - 김용삼 2003.01.23 1021 223
376 폭설 - 심재휘 2003.01.22 1077 169
375 편집증에 대해 너무 오래 생각하는 나무 - 이장욱 2003.01.21 1062 188
374 즐거운 소음 - 고영민 2003.01.18 1245 218
373 산책 - 이기성 2003.01.17 1446 222
372 저녁에 대해 여럿이 말하다 - 문태준 2003.01.16 1203 1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