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진 유리」/ 안주철/ '창작과비평' 2003년 가을호
깨진 유리
거지는 모닥불 앞에서 한 장씩 녹아 내리고 있었다
나는 그의 등 세 발짝 너머에서
마을을 지나칠 때마다 새를 쫓듯
아이들과 함께 돌멩이처럼 소리 지르고
발을 구를 때마다
뒤돌아보며 도망가던 그를 생각했다
그는 사람들이 마을을 떠나며 버린 정서를
겹겹이 입고 있었다
허리까지 깊숙이 타들어간 코트에선
참고할 만한 삶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삶이
어디에서 헐리게 될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모닥불 앞에서 일어나지 않았고
나는 내가 피워놓은 모닥불이 빨리 꺼지기를 빌고 있었다
내가 점심을 먹고 마을 입구에 나왔을 때에도
마을 빈집을 돌며 수십 장의 유리창을 깨고
다시 흑백사진을 뿌옇게 지키고 있는
액자를 깨고 돌아왔을 때에도
일어설 힘을 불 속으로 던지고 있었는지
모닥불은 꺼지지 않았다
저녁이 되면서 그의 몸은 다 녹아내려
모닥불 주위에 젖은 움막처럼 질척거리고
모닥불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그의 몸들이
깨진 유리처럼 얼어붙기 시작했다
[감상]
유년의 화자는 그 거지가 자신들이 피워놓은 모닥불에 불을 쬐고 있는 것이 못마땅했을 겁니다. 그는 '사람들이 마을을 떠나며 버린 정서를/ 겹겹이 입고 있었'고 또 '그의 삶이/ 어디에서 헐리게 될지' 모르는 운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모두들 떠나간 빈집에 들어가 유리창이나 깨고 있을 철없는 유년에서 '거지'는 또 다른 상징으로 남습니다. 모닥불이 꺼져도 일어서지 않는 그, 결국 싸늘하게 죽어가고 있는 지도 모를 그. 온통 깨진 채 방치되어온 그의 삶이 쓸쓸하게 남아 있습니다. 이쯤되면 빈집의 여백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