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깨진 유리 - 안주철

2003.10.29 18:08

윤성택 조회 수:1324 추천:167

「깨진 유리」/ 안주철/ '창작과비평' 2003년 가을호



        깨진 유리
    
    
        거지는 모닥불 앞에서 한 장씩 녹아 내리고 있었다
        나는 그의 등 세 발짝 너머에서
        마을을 지나칠 때마다 새를 쫓듯
        아이들과 함께 돌멩이처럼 소리 지르고
        발을 구를 때마다
        뒤돌아보며 도망가던 그를 생각했다
        
        그는 사람들이 마을을 떠나며 버린 정서를
        겹겹이 입고 있었다
        허리까지 깊숙이 타들어간 코트에선
        참고할 만한 삶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삶이
        어디에서 헐리게 될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모닥불 앞에서 일어나지 않았고
        나는 내가 피워놓은 모닥불이 빨리 꺼지기를 빌고 있었다
        
        내가 점심을 먹고 마을 입구에 나왔을 때에도
        마을 빈집을 돌며 수십 장의 유리창을 깨고
        다시 흑백사진을 뿌옇게 지키고 있는
        액자를 깨고 돌아왔을 때에도
        일어설 힘을 불 속으로 던지고 있었는지
        모닥불은 꺼지지 않았다
        저녁이 되면서 그의 몸은 다 녹아내려
        모닥불 주위에 젖은 움막처럼 질척거리고
        모닥불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그의 몸들이
        깨진 유리처럼 얼어붙기 시작했다
        

        

[감상]
유년의 화자는 그 거지가 자신들이 피워놓은 모닥불에 불을 쬐고 있는 것이 못마땅했을 겁니다. 그는 '사람들이 마을을 떠나며 버린 정서를/ 겹겹이 입고 있었'고 또 '그의 삶이/ 어디에서 헐리게 될지' 모르는 운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모두들 떠나간 빈집에 들어가 유리창이나 깨고 있을 철없는 유년에서 '거지'는 또 다른 상징으로 남습니다. 모닥불이 꺼져도 일어서지 않는 그, 결국 싸늘하게 죽어가고 있는 지도 모를 그. 온통 깨진 채 방치되어온 그의 삶이 쓸쓸하게 남아 있습니다. 이쯤되면 빈집의 여백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511 접열 - 권영준 2003.11.04 1051 186
510 비 오는 날 사당동에서 총알택시를 타다 - 정 겸 2003.11.03 1072 167
509 바닷가 이발소 - 안시아 [1] 2003.11.01 1203 171
508 바닷가 사진관 - 서동인 2003.11.01 1031 183
507 담배꽁초 - 송정호 [1] 2003.10.30 1185 171
» 깨진 유리 - 안주철 2003.10.29 1324 167
505 마늘까는 여자 - 채상우 2003.10.28 1267 173
504 골목의 캐비넷 - 정병근 2003.10.27 1120 192
503 비단 짜는 밤 - 정상하 [1] 2003.10.25 1107 182
502 정류하다 - 조동범 2003.10.24 1106 170
501 단풍나무 한그루의 세상 - 이영광 2003.10.23 1282 159
500 밤 막차는 왜 동쪽으로 달리는가 - 김추인 2003.10.21 995 156
499 사랑 - 이진우 2003.10.16 1764 164
498 우리 모르는 사이 - 서지월 2003.10.15 1743 164
497 오래 앉았던 언덕 버리고 - 장혜승 [1] 2003.10.13 1438 168
496 인생 - 박용하 [2] 2003.10.10 1881 159
495 그리운 소풍 - 오자성 [1] 2003.10.01 1388 187
494 굴뚝 - 안도현 [2] 2003.09.30 1516 176
493 움직이는 정물 - 김길나 2003.09.26 1114 183
492 처용암에서 1 - 김재홍 2003.09.24 1120 1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