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전 속에서」/ 서영미 / 현대시 2003년 10월호
정전 속에서
불을 꺼 봐!
암흑 속에서 떨어지는 물 한 방울의 소리를 들어 봐
소리는 네 정수리에 수직 바늘로 떨어질 것이다
보이지 않는 눈먼 눈으로 계단을 올라와
층계 끝에 위치한 방문 앞
문고리로부터 5cm 지점의 스위치를 찾아 봐
켜진 암흑 속에서 볼 수 없었던 경계와 거리
두려움의 길이와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던 위험들이
날선 눈으로 선명하게 초점을 잡아 갈 것이야
보이지 않던 풍경들이 그려지는 정전 속에서
계단을 내려가
무덤으로 다가서는 빛을 잡아 봐
무릎을 수 십 번 꺾으며 닳아지고 있던 물렁뼈
무뎌지고 있는 계단의 각과
오르내리던 발뒤꿈치의 군살
이것이 살아 있다는 의미인가
정전 속으로 들어가 봐
어둠 속에서 선명해지는 길을 찾아
속물들이 부르는 사연 없는 노래 일랑 잊어
가사 없이도 불러지는 보이지 않는 리듬을 흥얼거려 봐
소리 없이도 들리는 것들이 있지 않았느냐
불을 꺼!
[감상]
누구에게나 한번쯤은 어둠 속에 놓이게 될 때가 있습니다. 불편하고 거북한 어둠이 점차로 익숙해질 무렵은 청각이 시각을 거느릴 때입니다. 이 시는 그런 어둠을 피하지 않고, 좀더 내밀해질 것을 명령조로 안내합니다. 결국 '살아 있다는 의미'를 깨닫기 위해서는 어둠의 한 가운데 설 수 있어야한다는 얘기겠지요. 소리 없이도 들리는 곳은 그야말로 그 어둠 속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