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정전 속에서 - 서영미

2003.12.01 11:26

윤성택 조회 수:1121 추천:191

「정전 속에서」/ 서영미 / 현대시 2003년 10월호



        정전 속에서

        
        불을 꺼 봐!
        암흑 속에서 떨어지는 물 한 방울의 소리를 들어 봐
        소리는 네 정수리에 수직 바늘로 떨어질 것이다
        
        보이지 않는 눈먼 눈으로 계단을 올라와
        층계 끝에 위치한 방문 앞
        문고리로부터 5cm 지점의 스위치를 찾아 봐

        켜진 암흑 속에서 볼 수 없었던 경계와 거리
        두려움의 길이와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던 위험들이
        날선 눈으로 선명하게 초점을 잡아 갈 것이야

        보이지 않던 풍경들이 그려지는 정전 속에서
        계단을 내려가
        무덤으로 다가서는 빛을 잡아 봐

        무릎을 수 십 번 꺾으며 닳아지고 있던 물렁뼈
        무뎌지고 있는 계단의 각과
        오르내리던 발뒤꿈치의 군살
        이것이 살아 있다는 의미인가

        정전 속으로 들어가 봐
        어둠 속에서 선명해지는 길을 찾아
        속물들이 부르는 사연 없는 노래 일랑 잊어
        가사 없이도 불러지는 보이지 않는 리듬을 흥얼거려 봐
        소리 없이도 들리는 것들이 있지 않았느냐
        불을 꺼!


[감상]
누구에게나 한번쯤은 어둠 속에 놓이게 될 때가 있습니다. 불편하고 거북한 어둠이 점차로 익숙해질 무렵은 청각이 시각을 거느릴 때입니다. 이 시는 그런 어둠을 피하지 않고, 좀더 내밀해질 것을 명령조로 안내합니다. 결국 '살아 있다는 의미'를 깨닫기 위해서는 어둠의 한 가운데 설 수 있어야한다는 얘기겠지요. 소리 없이도 들리는 곳은 그야말로 그 어둠 속입니다.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531 사진 - 이영주 2003.12.10 1275 178
530 나타샤를 추억함 - 김진하 2003.12.09 1139 207
529 블랙박스 - 박해람 2003.12.08 1176 221
528 움직이는 별 - 박후기 [1] 2003.12.04 1598 238
527 옹이 - 이수정 2003.12.03 1249 225
526 죽음에 이르는 계절 - 조연호 [2] 2003.12.02 1317 201
» 정전 속에서 - 서영미 2003.12.01 1121 191
524 가난하다 - 조하혜 2003.11.28 1260 187
523 산란2 - 최하연 2003.11.27 1004 178
522 못질 - 장인수 2003.11.26 1123 160
521 너 - 김완하 2003.11.25 1434 187
520 살아야 한다는 근사한 이유 - 여림 [1] 2003.11.24 1771 204
519 출가 - 한용국 2003.11.20 1408 212
518 옛사랑, 서울역 광장에서 - 이성목 2003.11.18 1212 168
517 신호 - 최정숙 2003.11.17 1032 164
516 문은 안에서 잠근다 - 김행숙 2003.11.14 1215 167
515 도화 아래 잠들다 - 김선우 2003.11.12 1163 157
514 갈참나무 숲으로 가자 - 김은숙 2003.11.07 1195 174
513 단검처럼 스며드는 저녁 햇살 - 이덕규 2003.11.06 1140 161
512 목공소에서 - 마경덕 2003.11.05 1186 1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