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국적 구름공장 안을 엿보다』/ 이덕규/ 문학동네(신간)
단검처럼 스며드는 저녁 햇살
뒷골목 아무렇게나 버려진 빈 깡통과 소주병들이 가끔 누군가의 발길질에 한 번 더 찌그러지거나
좀더 투명한 제 속살을 보여주기 위해 산산조각이 나는 연습을 했다 어른들은
한 여름에도 허기진 호주머니 속에 손을 넣고 다녔고
담벼락엔 철 지난 흑백 포스터들이 반쯤 찢어져 무슨 쇠락한 이념처럼 펄럭였다 우리들은
그 뜻을 알려 하지 않은 채 자본의 전부인 구멍가게에서 불문의 서열을 세웠고 한낮
골방에 누워 속옷처럼 축축하게 말라가는 여자들에게서 언제든지 모든 것을 허락할 수 있는 사랑을 배웠다 그리고 조금씩
더 멀리 불야성의 거센 바다로 나아가 빛나는 야광체의 살찐 고기들을 향해 그물을 던졌다
그러나 그 불빛들은 좀체 걸려들지 않았고 좀더 세밀한 그물을 깁기 위해
늘 막배를 타고 멀미하듯 돌아왔다 더러는
너무 멀리 나아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이 어느 날 쫓기듯 돌아와
좁은 골목 출구 없는 미로 속으로 숨어들었다
흑백 포스터 위로 총천연색 구인광고물들이 수없이 덧붙여졌으나 여전히 그 뜻을 알지 못했고
어느새 빈 호주머니 속 익명의 슬픔에게 상처투성이인 손들이 습관처럼 불려들어갔다 그리고
누군가 내다버린 아직 식지 않은 연탄재 위로 뛰어내린 눈송이들이 거친 숨을 몰아쉬는 그 어디쯤,
막다른 골목 쪽창 안으로 단검처럼 스며드는 저녁 햇살이 언제든지 모든 것을
철거당할 수 있는 희망처럼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감상]
바닷가 근처 허름한 골목 안에서 살아가는 소시민의 삶을 이처럼 잔잔하게 풀어낼 수 있을까 싶군요. 이 시에서 호주머니에 대한 은유가 중요한 포인트인데, 시집 자서에 이런 말이 쓰여 있더군요. 그 글로 감상을 대신합니다.
스무 살 가을밤이었다. 어느 낯선 간이역 대합실에서 깜박 잠이 들었는데 새벽녘, 어떤 서늘한 손 하나가 내 호주머니 속으로 들어왔다.
순간 섬뜩했으나, 나는 잠자코 있었다.
그때 내가 가진 거라고는 날선 칼 한 자루와 맑은 눈물과 제목 없는 책 따위의 무량한 허기뿐이었으므로.
그리고, 이른 아침 호주머니 속에선 뜻밖에 오천원권 지폐 한 장이 나왔는데,
그게 여비가 되어 그만 놓칠 뻔한 청춘의 막차표를 끊었고, 그게 밑천이 되어 지금껏 잘 먹고 잘 산다.
- 이덕규 시인 自序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