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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참나무 숲으로 가자 - 김은숙

2003.11.07 14:18

윤성택 조회 수:1195 추천:174

『아름다운 소멸』/ 김은숙/ 시작(신간)



       갈참나무 숲으로 가자

        
        나의 사랑은 늘 불온하였다
        견뎌내거나 견뎌내지 못한 시간이
        시월의 저녁 아래 낮게 엎드리고
        갈참나무 매달린 저 작은 열매가
        이 계절의 정수리에 아프도록 빛난다
        굳어버린 생채기만 단단한 옹이로 키우며
        어설픈 열매조차 맺지 못한 내 불온한 사랑은
        저녁 갈참나무 숲에 와서 무릎을 꿇는다
        그대여 나여 지나간 사랑이여
        갈참나무 저 작은 도토리처럼
        떫은 몸 스스로를 몇 번이고 씻어내며 지워
        거친 밥상 따뜻하게 채우는 양식이 되거나
        해거름 쓸쓸한 가지로 날아드는 새에게
        푸근한 둥지 자리조차 내어주지 못한
        척박한 묵정밭의 생애여
        시월의 저녁 지금도
        붉나무 잎새는 눈부시게 더욱 붉어지고
        넉넉한 과즙의 사과 익어가며 수런거리는데
        후줄근히 구겨진 내 사랑의 허물은
        갈참나무 숲에 쌓인다
        


[감상]
갈참나무를 통해 '사랑'을 발견하는 정취가 좋습니다. 어쩐 일인지 갈참나무가 우거진 숲속에 서 있는 것처럼 신선한 공기가 느껴집니다. 그것은 뭐라고 할까요. 시각과 청각 촉각, 그리고 미각까지 골고루 어루만져주는 힘에 있지 않을까 싶은데요. 특히 '떫은 몸 스스로를 몇 번이고 씻어내며' 부분이 그렇군요. 사실 지금껏 보아온 많은 시들에서 '미각'을 돋보이게 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영상미디어의 발달이 그러하듯 우리는 시각이 우선되어 발달한 셈이니까요. 여하간 걱실걱실한 갈참나무에서 떨어진 도토리가 낙엽들과 섞여 또 하나의 갈참나무로 자랄 수 있음을, 그런 기대치가 불온한 사랑을 꿈꾸게 한다는 것은 기억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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