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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가 - 한용국

2003.11.20 11:32

윤성택 조회 수:1408 추천:212

출가/ 한용국 /『현대시』2003년 11월호



        출가

        
        1.       
        아버지는 자주 집을 비우시고
        어머니는 절에 다니기 시작했다
        선인장 화분의 가시들이 날카롭게
        형광등 아래에서 빛날 때마다
        조금씩 일렁이며 엎질러지는
        물 속의 집
        
        2.         
        거리마다 나무들은
        마르고 빈 가지들을 허공에 흔들었지만
        어디서도 이파리의 조짐은 보이지 않았다
        바람은 밤마다 벽에 봄을 낙서하고
        아침이면 강으로 가
        얼음 속의 돌들에게 읽어주곤 했다
        
        3.        
        다시는 태어나지 말아야 한다
        출가하려므나, 어머니
        저는 출가한 지 이미 오래인걸요
        폭설 속에서 무엇을 계속 쓸고 계시는지
        저도 그래야 할까요
        한 걸음 걷고 나면 돌아서서
        깨끗이 비질하는 삶을 살아야 할까요
        
        4.        
        십 년 만의 귀가, 십 년 내내
        면벽 중이신 어머니, 등에 수풀이 우거져 있었다
        하염없이 물 속으로 잔뿌리는 밀어 내리는
        양파의 가계(家系), 나는
        가부좌를 틀고 종달새처럼 노래하기 시작했다





[감상]
고단한 가족사, 그 안에서 자라온 화자. 그리고 어머니의 종교가 갖는 의미. 흑백영화를 보듯 잔잔하게 흘러가는 네 편의 이미지가 있습니다. 출가란 세속의 집을 떠나 불문(佛門)에 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 유약한 화자의 출가란 '나는/ 가부좌를 틀고 종달새처럼 노래하기 시작했다'의 결미가 강렬하게 말해주듯, 결국 미쳐져 가는 정신의 출가가 아닌가 싶습니다. 겨울 텃새인 종달새가 지저귀는 이유는 암컷을 부르기 위해서보다는 텃세권을 차지하기 위해서랍니다. 문득 슬프게도, 이 시에서 화자의 자리가 어디인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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