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이영주 / 2000년 <문학동네> 로 등단
사진
무너진 사원에 앉아
소녀는 때절은 발을 까딱거린다
얼른 찍어가세요
곧 해가 질 거에요
밑단이 찢어진 치마 사이로
발가락이 까딱 까딱
나는 렌즈 속으로 소녀를 밀어 넣는다
사원의 진흙을 부둥켜안고 소녀는
프레임에 갇힌다
해가 지기 전에 데려가 줘요
찰칵찰칵
수많은 렌즈가 소녀를 밀어 넣는다
수많은 소녀가 사원으로 몰려온다
수많은 발가락이 까딱거린다
야근을 마치고 버스를 기다리던 밤
가방을 깔고 앉은 한 소녀가
다리를 꼬고 발을 까딱거리고 있다
소녀의 짙은 눈에 박힌 오래된 진흙
나는 렌즈 속으로 소녀를 밀어 넣는다
잘려진 발가락이 프레임 밖으로 떨어진다
가로등 밑,
내 왼발이 푸르게 부어 오른다
[감상]
사진이라는 기술 참 묘하지요. 과거의 어느 순간을 찍었을 뿐인데 그 안에는 추억이 고스란히 묻어와 기억을 재생시키니까요. 이 시는 물체의 화상(畵像)을 찍어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소녀를 데려온다는 발상으로 진행됩니다. 물론 야근을 마치고 버스를 기다리는 상황이지만, 사진 속 소녀와 그 저녁 가방을 깔고 앉은 소녀를 오버랩 시키면서 현실과 과거의 간극을 허물어버립니다. 더 나아가 화자까지 프레임에 넣고야마는 결말은, 현실과 환상 그리고 과거와 현재 사이에 우리를 걸쳐 놓습니다. 하여 상상력이란 나를 그 테두리안으로 밀어 넣어 겪어내기, 바로 그 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