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사랑, 서울역 광장에서/ 이성목/1996년 『자유문학』으로 등단
옛사랑, 서울역 광장에서
별이 되려다가 실패한 인생들이 별을 보며 병나발을 불었다
환속에 실패한 그림자가 지하도 계단에 앉아 등을 구부렸다
세상의 호명을 기다리던 자판기 속
분내 나는 화장지 한 겹 한 겹 광장 모퉁이로 모여들었다
말의 단맛을 본 공중전화는 어떤 시대와도 소통되지 못하고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저 쪽의 부재를 알리는 단속음이 오래
들려 왔다 야음을 틈타 상경했던 완행열차 쇳소리 같은
추억이 잠시 서울에 세 들어 살다가, 서울이 되려다가
실패한 신도시와 함께 총알택시를 타고 떠나고 있었다
한때 너도 세상의 성모가 되려 했던 적이 있었다 중년의
여자는 80년대식 가투처럼 바닥에 드러누웠다 한 번만
우리 다시 피비린내 나는 섹스를 즐기지 않겠냐고 가끔은
옛날이 그립기도 했었다고 쪼그라든 젖꼭지에 담뱃불을 비볐다
몸에 불꽃이 일던 새벽, 공중변소에 오줌을 질질 흘려 놓고 나는
옛사랑 버렸다 버린 놈에게 무슨 놈의 인생이 있겠냐고 진저리 치며
미화원들이 리어카마다 깨진 불알을 소복하게 쓸어 담았다
서울의 일박이 실패한 사랑을 싣고 어디론지 떠나고
집 나온 자본주의의 똥개 한 마리 미명을 가로질러
넥타이를 질질 끌며 광장 밖으로 걸어 나가고 있었다
[감상]
치열함이 느껴지는 시입니다. 그래서 웬만한 관찰력 없이는 쓸 수 없는 대목이기도 하고요. 도둑질 빼고는 다 해보았다는 서울에서의 기형도 시처럼, 삶의 장소가 되어버린 서울역 광장은 절박함 그 자체의 상징을 가집니다. 추한 것, 소외된 것, 이런 것을 온몸으로 부딪쳐 밀고 가는 시인의 필력에 깊은 감동을 느낍니다. 서울역 광장에서 나는, 별을 보며 병나발을 불 수 있을까, 싶은 옛사랑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