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넛, 비어있음으로 존재한다』/ 조하혜 / 천년의 시작
가난하다
이른 새벽에 양말부터 찾아 신는 발은 가난하다
당신과 이별한 다음날, 고구마를 삶아 먹던
허기는 가난하다
고구마를 찌르던 젓가락은 가난하다
고구마를 제 몸 안으로 삼키던 창자는 가난하다
사랑한다면서 손이 어여쁜 여인은 가난하다
시간이 없어서 밤낮 고단한 사람은 가난하다
가난해서 이별하는 사람은 가난하다
가난 때문에 가난해진 사람은 가난하다
가난함으로 인해 전혀 가난하지 않게 된 사람은 가난하다
낙엽진 단풍나무에게서 앙상한 가지를 기억하는
눈은 가난하다
가난하다고 말하는 이 엄살은 가난하다
가난보다 더 빈곤하다
[감상]
가난은 외롭고 쓸쓸한 것일까요. 가난하다라는 이 시를 읽으면서 저물 무렵 마지막 햇살을 보는 듯한 느낌입니다. 그래서 이 시의 가난은 궁핍이라기보다는 누구에나 적용되는 감정적인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가난은 고구마를 삶아 먹는 것보다 그 이별의 '허기'에 더 무게가 있고, 앙상한 가지를 들여다보는 시선에 더 쓸쓸함이 배여 있는 거겠지요. 사실 마음이든 삶이든 가난의 언저리에 있을 때 詩가 잘 보입니다. 누가 그랬던가요, 세상살이에 서툴고 가난에 익숙하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