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자는 유죄다》/ 류외향/ <시작> 시인선 (2003)
그리운 안개
팔을 뻗으면 그믐의 어둠보다
더 캄캄하게 삼켜버리는
심장마저 지독히 막막하고 아득한 물방울로
채워버리는 안개 속에서
처음으로 소리내어 엄마를 불러보았던가
아파서 썩지 않는 몸의 기억
갈대들은 제 몸을 흔들어 바람을 말하고
벼포기들은 모로 누워 또 다른
뿌리를 내리며 폭풍을 말하고
그 모든 것을 안개가 먹이고 키웠던 것이다
소읍의 바람소리 비소리
다 거두어들이던 안개
더 깊숙이 나를 삼켜라
더 더 깊숙이 나를 품어라
안개의 감옥 속에서
아이를 낳고 싶었다
하늘도 모르게 눈물 흘렸던가
아파서 아프지 않았던가
잘못 든 꿈이었던가
더 이상 꿈꾸지 않는 몸은
시래기처럼 말라가는가
느리게 느리게 점멸하는 생이여
나는 미이라처럼 썩지 않을 것이다
죽어서도 잊지 못할 추억이 있으리니
[감상]
어느 소읍에 태풍이 지났고 한 여자가 홀로 싸늘한 방에서 울고 있습니다. 안개는 상처를 감쌌으나 가까이 가서 보면 제각각 실존의 흔적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시를 읽다보면 낙태의 이미지가 자꾸 떠오릅니다. '아이를 낳고 싶었다/ 하늘도 모르게 눈물 흘렸던가/ 아파서 아프지 않았던가' 이 토로로 말미암아 소읍은 일순 슬프고 쓸쓸한 풍경으로 전이됩니다. 어딘가에 죽어서도 잊지 못할 추억이 있어 온몸이 미라처럼 말라가도 상관하지 않겠다, 영영 썩지 않겠다는 지독한 다짐. 죽고 나면 땅으로 반납해야할 육신조차 이 시에서는 꿈의 영역에 있습니다. 그러니 이 생의 안개가 내내 머물길 바라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