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도서관에서」/ 남궁명 / 2004년 《시로 여는 세상》봄호
가을, 도서관에서
책장마다 고요가 칭칭 휘감겨 있다
책상을 성벽처럼 빙 둘러싼 의자들
누군가 의자에 침투하려 하면
현상 붙은 죄인처럼 삐걱, 침묵을 들키고 만다
발자국들도 자기 죄성을 깨닫고
살금살금 정체를 숨죽인다
책 속 잘 익은 자양분을 씹어 먹는
눈빛들의 되새김질로
귀 멍멍한 고요, 지금 가을은
행간의 깊은 사유(思惟)를 훔치고 있다
창 틈 행군해오는 햇살과
사서의 졸린 눈썹이 벌이는 무료한 전투
채칵채칵, 파수꾼인 벽시계 소리가
활자들의 꿈을 사수(死守) 중이다
소음과 질주로부터 해방된
고요한 왕국이 점점 강건해져 간다
문득, 창 밖 새소리가 한 줄의 문장을
훔쳐 읽고 달아나는데
왕국은 다시 내밀한 말줄임표로 잠잠해진다
[감상]
누구나 한번쯤 도서관 의자를 빼내다가 그 소리 때문에 혀 빼물고 겸연쩍어 했던 적이 있을 것입니다. 이 시는 그런 어느 햇볕 좋은 가을 도서관을 절묘한 묘사로 보여줍니다. 초침소리 뿐인 도서관을 이처럼 죄와 전투 등으로 표현해내는 힘은 활기찬 생명의 것으로 맞바꿔내는 상상력에 있습니다. 고요 속 부산한 안온함을 들여다볼 줄 아는 시선이 청명한 가을하늘처럼 깨끗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