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가을, 도서관에서 - 남궁명

2004.10.14 17:37

윤성택 조회 수:1638 추천:226

「가을, 도서관에서」/ 남궁명 / 2004년 《시로 여는 세상》봄호


        가을, 도서관에서
        
        책장마다 고요가 칭칭 휘감겨 있다
        책상을 성벽처럼 빙 둘러싼 의자들
        누군가 의자에 침투하려 하면
        현상 붙은 죄인처럼 삐걱, 침묵을 들키고 만다
        발자국들도 자기 죄성을 깨닫고
        살금살금 정체를 숨죽인다
        책 속 잘 익은 자양분을 씹어 먹는
        눈빛들의 되새김질로
        귀 멍멍한 고요, 지금 가을은
        행간의 깊은 사유(思惟)를 훔치고 있다
        창 틈 행군해오는 햇살과
        사서의 졸린 눈썹이 벌이는 무료한 전투
        채칵채칵, 파수꾼인 벽시계 소리가
        활자들의 꿈을 사수(死守) 중이다
        소음과 질주로부터 해방된
        고요한 왕국이 점점 강건해져 간다
        문득, 창 밖 새소리가 한 줄의 문장을
        훔쳐 읽고 달아나는데
        왕국은 다시 내밀한 말줄임표로 잠잠해진다


[감상]
누구나 한번쯤 도서관 의자를 빼내다가 그 소리 때문에 혀 빼물고 겸연쩍어 했던 적이 있을 것입니다. 이 시는 그런 어느 햇볕 좋은 가을 도서관을 절묘한 묘사로 보여줍니다. 초침소리 뿐인 도서관을 이처럼 죄와 전투 등으로 표현해내는 힘은 활기찬 생명의 것으로 맞바꿔내는 상상력에 있습니다. 고요 속 부산한 안온함을 들여다볼 줄 아는 시선이 청명한 가을하늘처럼 깨끗합니다.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691 심장의 타종 - 박판식 2004.11.19 1332 176
690 나무는 지도를 그린다 - 송주성 [4] 2004.11.17 1452 183
689 달팽이 - 전다형 [1] 2004.11.16 1573 172
688 선명한 유령 - 조영석 2004.11.15 1122 165
687 방바닥에 떨어진 머리칼 - 박형준 2004.11.12 1214 177
686 눈 내리니 덕석을 생각함 - 박흥식 [3] 2004.11.09 1158 164
685 아마추어 레슬링 선수의 슬픈 두 귀 - 박후기 2004.11.08 1138 170
684 정류장 - 안시아 2004.11.06 1654 194
683 뗏목 - 조은영 2004.11.04 1265 179
682 도배를 하다가 - 문신 2004.11.02 1257 181
681 정비공장 장미꽃 - 엄재국 2004.11.01 1105 183
680 이탈 - 이장욱 2004.10.28 1405 191
679 옛 골목에서 - 강윤후 [1] 2004.10.26 1730 203
678 찢어진 방충망 - 이기인 2004.10.25 1521 182
677 함평 여자 - 이용한 [2] 2004.10.23 1280 205
676 폭설, 민박, 편지2 - 김경주 [1] 2004.10.22 1365 206
675 냄비 - 문성해 2004.10.21 1450 223
674 똥구멍으로 시를 읽다 - 고영민 [1] 2004.10.19 1561 198
673 타워크레인 - 고경숙 2004.10.18 1223 209
» 가을, 도서관에서 - 남궁명 [2] 2004.10.14 1638 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