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친 나무상자」/ 안주철/ 2002년 《창작과비평》신인상으로 등단
거친 나무상자
사과나무 아래에는
녹슨 전기밥솥과 뒤집어진 양말 한짝
과수원집의 대문 문고리가
벌레 먹은 사과 옆에
떨어져 있고
빈집 벽에는 내가 그려논
몇 덩어리의 달이
풀숲에 엉겨 있는
김씨와 김씨의 아내를 희미하게
비추고 있다
사과나무 그림자는 대문처럼
사과나무 아래 검게 닫혀 있고
사과나무 그림자 속으로
몰래 들어가버린 김씨와
사과나무 그림자를 버리고 떠난
김씨의 아내는
바람이 불 때마다
사과나무 이파리 사이로
한입 베어먹은 사과처럼
옷을 추스르고
사과나무 아래
버려진
거친 나무상자에는
썩은 사과와 잎들이
쌓여 있고
이끼 낀 상자바닥은 축축하게
사과나무 뿌리에 엉겨붙은
김씨의 아내의 거웃처럼 젖어 있다
[감상]
퇴락한 과수원집 묘사만으로도 그 내력을 가늠할 수 있는 시입니다. 사과나무가 갖는 상징을 결국 ‘김씨의 아내’의 것으로 몰고 가는 비유도 눈여겨볼만 합니다. 시 속 ‘그림자’가 차지하는 복선도 묘한 재미가 있고요. 그러니 세상 모든 빈집에는 사연이 있습니다. 그것을 귀 기울여 들을 수 있는 건, 진정 시인의 몫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