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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숙에서 보낸 한철 - 김경주

2004.12.13 14:47

윤성택 조회 수:1472 추천:185

<여인숙에서 보낸 한철>/ 김경주/ 《시작》2004년 겨울호

        
        여인숙에서 보낸 한철

        한 밤중 맨발로 복도를 걸어가
        공동화장실에서 몰래 팬티를 빤다
        방으로 돌아와
        발가락을 뻗어 스위치를 끄고 누우면
        외롭다 미라처럼
        창틈의 날벌레들은 입을 벌린 채 잠들고
        어제는 터진 베개 솜 같은 눈들이
        방안까지 뿌려졌다
        내가 마지막이 아니라서
        이 이불은 또 펼쳐질 것이지만
        피부병처럼 피어있는 이불위의 꽃잎들,
        밤마다 문틈으로 흘러온
        옆방 기침소리처럼 피가 묻어 있는 것은
        
        *

        방안 곳곳 낙서처럼 살다간
        사람들 머리카락 몇 줄,
        손끝에서 가루로 부서진다
        때 절은 하모니카를 속이불로 밤새 닦거나
        철지난 주간지 위에 뜬 발톱을 깎아 놓는 일,
        배를 잡고 화장실 순서를 기다리며
        눈이 튼 사람들과 비린 아침을 주고받는 일은
        아름다웠다 저마다의 독채에선
        아침마다 작약냄새 환하게 피어올랐다

        언제쯤 내 몸을 거절하지 않는 위증이
        희망이 아닐 수 있을까
        이불속에 들어가 라디오를 끌어안으며
        사람들은 산다 허구처럼,
        몇 줄의 최전방을 수첩 속에 갈겨 놓은 채

        아침이면
        나는 촛농처럼 조용히 바닥에 흘러있을 것이다


[감상]
요즘 젊은 시인 목소리에서 이런 주제가 있다니 놀랍습니다. 가난이 시의 재료가 될 순 없지만, 삶의 자리가 그 자체로 새로운 통찰이 될 수 있습니다. 문학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형상을 지닌 채 시인과 가장 가까이 있기 때문입니다. 절망이나 고통에서 더 빛나는 것이 시인 것처럼, 이 시 곳곳 배여 있는 감성적 코드가 감동을 더해줍니다. 가령 ‘외롭다 미라처럼’ 행은 그 자체도 자체지만 앞뒤 연결 부분으로서 빼어난 미적성취가 돋보입니다. 낮은 곳에 처연히 자신을 투사할 수 있는 자세가 부러운 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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