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작은 처녀들 / 황병승/ 《파라21》2004년 겨울호
너무 작은 처녀들
소년도 소녀도 아니었던 그 해 여름
처음으로 커피라는 검은 물을 마시고
처음으로 나 자신에게 삐뚤빼뚤 엽서를 쓴다
누이가 셋이었지만 다정함을 배우지 못했네
언제나 늘 누이들의 아름다운 치마가 빨랫줄을 흔들던 시절
거울 속의 작은 발자국들을 따라 걷다보면
계절은 어느덧 가을이고 길을 잃지 않기 위해 놓아둔 흰 자루들
자루 속의 얼굴 없는 친구들은 시간이 해결해줄 거라고
스무 살의 나에게 손가락 글씨를 쓴다
그러나 시간이 무엇을 해결해 줄 수 있을까
새들은 무거운 음악을 만드느라 늙지도 못했네
언제나 늘 누이들의 젖은 치마가 빨랫줄을 늘어뜨리던 시절
쥐가 되지는 않았다 늘 그 모양이었을 뿐.
뒤뜰의 작은 창고에서 처음으로 코밑의 솜털을 밀었고
처음으로 누이의 젖은 치마를 훔쳐 입었다 생각해보면,
차라리 쥐가 되고 싶었다
꼬리도 없이 늘 그 모양인 게 싫어
자루 속의 친구들을 속인 적도 상처를 준적도 없지만
부끄럼 많은 얼굴의 아이는 거울 속에서 점점 뚱뚱해지고
작은 발자국들을 지나 어느새 거울의 뒤쪽을 향해 걷다보면
계절은 겨울이고, 아무도 돌봐주지 않는 시간
나아갈 수도 돌아갈 수도 없는 어둠속에서
조금 울었고 손을 씼었다
[감상]
누이들 밑에서 자란 화자의 유년시절 감수성과 심리묘사가 잔잔한 울림을 줍니다. 특히 스무 살이 된 화자 자아정체성과 자신에게 맞는 역할을 찾기 위해 불확실한 자신을 들여다보는 거울보기가 인상적입니다. 자루 속에 들어 있던 얼굴은 추억 속 수많은 분신이었을 것이고, 그것들을 기억하는 화자는 언제나 ‘누이의 젖은 치마를 훔쳐 입었’던 시절로 되돌아가곤 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것은 제목에서 암시하듯 자신의 ‘너무 작은 처녀들’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이제는 변성기를 거쳐 수염이 자란 화자의 쓸쓸한, 돌아갈 수 없는 정체성이 아슴아슴 마음에 다가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