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너무 작은 처녀들 - 황병승

2004.12.27 14:38

윤성택 조회 수:1358 추천:210

너무 작은 처녀들 / 황병승/ 《파라21》2004년 겨울호


        너무 작은 처녀들

        소년도 소녀도 아니었던 그 해 여름
        처음으로 커피라는 검은 물을 마시고
        처음으로 나 자신에게 삐뚤빼뚤 엽서를 쓴다


        누이가 셋이었지만 다정함을 배우지 못했네
        언제나 늘 누이들의 아름다운 치마가 빨랫줄을 흔들던 시절


        거울 속의 작은 발자국들을 따라 걷다보면
        계절은 어느덧 가을이고 길을 잃지 않기 위해 놓아둔 흰 자루들
        자루 속의 얼굴 없는 친구들은 시간이 해결해줄 거라고
        스무 살의 나에게 손가락 글씨를 쓴다
        그러나 시간이 무엇을 해결해 줄 수 있을까


        새들은 무거운 음악을 만드느라 늙지도 못했네
        언제나 늘 누이들의 젖은 치마가 빨랫줄을 늘어뜨리던 시절


        쥐가 되지는 않았다 늘 그 모양이었을 뿐.
        뒤뜰의 작은 창고에서 처음으로 코밑의 솜털을 밀었고
        처음으로 누이의 젖은 치마를 훔쳐 입었다 생각해보면,
        차라리 쥐가 되고 싶었다
        꼬리도 없이 늘 그 모양인 게 싫어


        자루 속의 친구들을 속인 적도 상처를 준적도 없지만
        부끄럼 많은 얼굴의 아이는 거울 속에서 점점 뚱뚱해지고


        작은 발자국들을 지나 어느새 거울의 뒤쪽을 향해 걷다보면
        계절은 겨울이고, 아무도 돌봐주지 않는 시간
        나아갈 수도 돌아갈 수도 없는 어둠속에서
        조금 울었고 손을 씼었다


[감상]
누이들 밑에서 자란 화자의 유년시절 감수성과 심리묘사가 잔잔한 울림을 줍니다. 특히 스무 살이 된 화자 자아정체성과 자신에게 맞는 역할을 찾기 위해 불확실한 자신을 들여다보는 거울보기가 인상적입니다. 자루 속에 들어 있던 얼굴은 추억 속 수많은 분신이었을 것이고, 그것들을 기억하는 화자는 언제나 ‘누이의 젖은 치마를 훔쳐 입었’던 시절로 되돌아가곤 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것은 제목에서 암시하듯 자신의 ‘너무 작은 처녀들’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이제는 변성기를 거쳐 수염이 자란 화자의 쓸쓸한, 돌아갈 수 없는 정체성이 아슴아슴 마음에 다가옵니다.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711 2005신춘문예 당선작 모음 [8] 2005.01.03 2300 229
710 궤도를 이탈한 겨울, 밤 - 유문호 [1] 2004.12.29 1338 206
» 너무 작은 처녀들 - 황병승 [1] 2004.12.27 1358 210
708 성당부근 - 정 린 2004.12.24 1176 190
707 고려장 2 - 정병근 2004.12.23 1104 197
706 언젠가는 - 조은 2004.12.22 1696 194
705 가구의 꿈 - 조덕자 [1] 2004.12.21 1194 204
704 쓸쓸한 중심 - 이화은 [2] 2004.12.16 1560 179
703 여인숙에서 보낸 한철 - 김경주 [8] 2004.12.13 1472 185
702 그 이발소, 그 풍경 - 고경숙 2004.12.10 1282 215
701 불 꺼진 지하도 - 강신애 2004.12.08 1159 191
700 막돌, 허튼 층 - 이운룡 2004.12.07 1049 202
699 오조준 - 이정화 [1] 2004.12.06 1065 203
698 콩나물국, 끓이기 - 이동호 2004.12.03 1399 202
697 거친 나무상자 - 안주철 [1] 2004.12.01 1186 177
696 voyant - 김춘수 [1] 2004.11.30 1196 192
695 그 저녁 - 김다비 [1] 2004.11.29 1511 217
694 흔적 1 - 황상순 [7] 2004.11.27 1544 207
693 울릉도 - 도혜숙 [1] 2004.11.25 1271 177
692 누가 우는가 - 나희덕 [1] 2004.11.23 1609 173